남노성(南老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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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노성 |
한글표제 | 남노성 |
한자표제 | 南老星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명서(明瑞) |
호 | 운곡(雲谷), 현곡(玄谷)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03년(선조 36) |
사망 | 1667년(현종 8) 10월 16일 |
본관 | 의령(宜寧) |
주거지 | 서울[京]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
증조부 | 남언경(南彦經); 생원(生員), 이조 참의(參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 |
조부 | 남격(南格); 용문처사(龍門處士) |
부 | 남호학(南好學); 생원시(生員試) 장원, 세자익위사 사어(司禦) |
모_외조 | 안동김씨(安東金氏); 좌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 |
처_장인 | (첫째부인) 한씨(韓氏); 한의(韓嶷)의 딸 (둘째부인) 이씨(李氏); 이안인(李安訒)의 딸 |
자녀 | (1자) 남택하(南宅夏); 회양부사(淮陽府使)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노성(南老星) |
총론
[1603년(선조 36)∼1667년(현종 8) = 65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예조 참판(參判)이다. 자(字)는 명서(明瑞)이고, 호(號)는 운곡(雲谷)⋅ 현곡(玄谷)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세자익위사 사어(司禦)남호학(南好學)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좌의정김상용(金尙容: 김상헌의 형)의 딸이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 남언경(南彦經)의 증손자이고, 예조 판서남이성(南二星)의 8촌 형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2세였다.[<사마방목>]
1631년(인조 9) 황감제(黃柑製)에서 3위를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하는 특전을 받아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문과방목>]
1634년(인조 12)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1636년(인조 14) 중시(重試) 을과(乙科)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문과방목>] 같은 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637년(인조 15)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38년(인조 16)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1639년(인조 17)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佐郎)이 되었다.
1640년(인조 18)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이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었다.
1641년(인조 19)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청(淸)나라 심양관(瀋陽館)으로 갔는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서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서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던 봉림대군을 모시고 환국하였다.
1642년(인조 20) 다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644년(인조 22)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고, 1645년(인조 23)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1646년(인조 24) 사헌부 집의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647년(인조 25)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648년(인조 26)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승지(承旨)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652년(효종 3)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1654년(효종 5)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지를 거쳐,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김광욱(金光煜)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을 갔다가 돌아왔다.
1655년(효종 6)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승지가 되었고, 또 동지사의 부사에 임명되어, 정사이개윤(李愷胤)과 서장관 안후직(安後稷)과 함께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56년(효종 7)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참의가 되었고, 1657년(효종 8) 함경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과 서장관 목겸선(睦兼善)과 함께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660년(현종 1) 개경부 유수(留守)로 나갔는데, 병으로 사직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개경부 유수남노성은 영부사(領府事)이경석(李景奭)과 개성 유생들의 옥사(獄事)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파직되었다.
1661년(현종 2) 의금부 동지사(同知事)에 되었고,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1662년(현종 3) 대사간으로 있다가, 병으로 임금의 소패(召牌: 임금이 명패로써 급히 부르는 것)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60세였다.
1663년(현종 4)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고,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64년(현종 5) 다시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65년(현종 6) 다시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으나,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정양하다가, 1667년(현종 8) 10월 16일에 돌아갔는데, 향년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1667년(현종 8) 10월 16일에 남노성이 돌아갔을 때 그의 졸기(卒記)를 보면, “의금부 동지사남노성이 돌아갔다. 남노성은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송시열의 노론(老論)들에게 배척을 받아서 다시는 청요직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였다.[『현종실록』 8년 10월 16일 2번째기사]
1660년(현종 1) 11월에 남노성이 개성부 유수로 있을 때 개성부 유생(儒生)들이 한 밤중에 패싸움을 벌렸으므로, 유수남노성이 유생들을 잡아다가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처벌하였으나, 옥사를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사헌부에서 남노성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파직하였다. 처음에 영부사(領府事)이경석(李景奭)이 개성 유수남노성의 옥사 처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어전(御前)에서 현종에게 아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였다. 영부사이경석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개성 유수남노성이 이를 듣고 노하여, 옥사 처리에서 죄를 받은 자들이 많은 뇌물을 이경석에게 주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이경석이 매우 노하여, 현종에게 상소를 올려서 자기의 결백을 해명하였다. 현종이 사헌부에 개성 유수남노성의 죄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는데, 사헌부에서 의율(擬律)하여 남노성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파직하였다. 당시 개성부의 이른바 유생(儒生)이란 자들은 거개가 시정 상인의 자제들이고, 그들이 서로 싸운 것도 어두운 한 밤중에 생긴 일이므로, 각기 개인적인 친분을 따라 자백하는 말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현종실록』 1년 11월 19일 2번째기사]
1641년(인조 19) 4월에 남노성은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잡혀가서 머물고 있는 청(淸)나라 심양관(瀋陽館)으로 가게 되었다. 남노성이 심양(瀋陽)으로 떠나기 전에 원주(原州)에 가서 어머니 김씨를 만나뵙고 서울로 돌아올 때에 중간에 그의 외조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묘소에 배알하고 참배하려고 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를 막으면서, “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 조정에 나아가서 벼슬한 것은 이미 외조부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제 직무(職務)로 인해 심양으로 들어가며, 외조부의 묘소에 배알할 경우에, 외조부의 혼령이 계시다면, 반드시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제발 너는 묘소에 가지 말아라.” 하였다.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세자빈과 원손(元孫)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으나,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이 오랑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강화성을 함락하였는데, 그때 김상용은 화약에 불을 질러서 자폭하여 죽었다. 그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난 갔던 인조는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포위되어 싸웠는데, 주화파 최명길(崔鳴吉)과 척화파 김상헌(金尙憲: 김상용의 동생)이 서로 크게 논쟁하였다. 인조는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잡혀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에 있다.
첫째부인 한씨(韓氏)는 한의(韓嶷)의 딸이고, 둘째부인 이씨(李氏)는 이안인(李安訒)의 딸이다. 아들 남택하(南宅夏)는 회양부사(淮陽府使)를 지냈다. 1666년(현종 7) 12월에 대간에서 남노성을 탄핵하기를, “호조 참판남노성은 자기 첩의 자식을 남두병(南斗柄)의 시양자로 삼고 관아에 서안(書案)을 올려 입안(立案)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남노성에게 서자(庶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각사등록(各司謄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구암집(歸巖集)』
- 『구정유고(龜亭遺藁)』
- 『금옹집(錦翁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당촌집(塘村集)』
- 『동강유집(東江遺集)』
- 『동명집(東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곡집(明谷集)』
- 『문곡집(文谷集)』
- 『백헌집(白軒集)』
- 『사우당집(四友堂集)』
- 『서계집(西溪集)』
- 『서원등록(書院謄錄)』 『성담집(性潭集)』
- 『성옹유고(醒翁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남집(市南集)』
- 『약천집(藥泉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완당전집(阮堂全集)』
- 『월주집(月洲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정관재집(靜觀齋集)』
- 『졸재집(拙齋集)』 『죽남당고(竹南堂稿)』 『죽서집(竹西集)』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표암고(豹菴稿)』
- 『한강집(寒岡集)』
- 『해사록(海槎錄)』
- 『호주집(湖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