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철(南公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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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60년(영조 36)∼1840년(헌종 6) = 81세.] 조선 후기 정조~헌종 때의 문신. 문장가. 점성학자. 행직(行職)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자(字)는 원평(元平)이고, 호(號)는 금릉(金陵), 또는 사영(思穎)⋅영옹(潁翁)⋅귀은당(歸恩堂) 등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京] 명례방(明禮坊)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남유용(南有容)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통덕랑(通德郞)김석태(金錫泰)의 딸이다. 가학(家學)을 통하여 당대 제일가는 문장가가 되었고, 김상임(金相任)⋅성대중(成大中)⋅이덕무(李德懋)⋅김재련(金載璉)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정조 시대 활동

1780년(정조 4) 나이 21세 때, 승보시(陞補試: 소과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782년(정조 6) 봄에 정조가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서 유생(儒生)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탐화연부(探花宴賦)』를 짓게 하였는데, 정조가 남공철의 지은 글을 칭찬하고 지필묵(紙筆墨)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당시 정조는 문장(文章)의 신풍(新風) 운동을 전개하려고 문장에 뛰어난 인재들을 찾고 있었다. 더구나 남공철의 아버지 남유용은 일찍이 사도세자(思悼世子)와 왕세손(王世孫: 정조)의 사부(師傅)였기 때문에 정조는 남공철을 각별히 신임하였다. 이에 1784년(정조 8) 음직(蔭職)으로 세자익위사 세마(洗馬)가 되었다가, 6품의 사옹원 주부(主簿)가 되었다.

1785년(정조 9)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는데, 대과(大科)에 합격하지 않고 대간(臺諫)의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므로, 정조가 남공필을 신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786년(정조 10)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경상도 산청현감(山淸縣監)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 장흥고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1789년(정조 13) 종묘서 령(令)이 되었다.

1790년(정조 14) 전라도 임실현감(任實縣監)이 되었는데, 그해 여름에 산청현감 때 조적(糶糴)의 곡물을 축냈다고 하여, 의금부의 추고(推考)를 받고 파직되었다. 이때 성균관에서 과거 시험을 다시 시작하였다.

1791년(정조 15) 사복시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1792년(정조 16) 성균관 유생에게 대책(對策)으로 제술을 시험보이는 인일제(人日製: 인일에 성균관 유생에게 제술을 시험보이는 과거)에서 남공철이 장원을 차지하여, 바로 회시(會試)로 직부(直赴)하였다. 그해 남공철은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문과방목>] 비로소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정조의 신임을 얻은 남공필은 이때부터 청요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병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춘추관 사관(史官)을 특별히 겸직하였다. 또 홍문관의 청요직에 임용될 젊은 인재들을 미리 뽑는 홍문록(弘文錄)에 선록(選錄)되었고, 사복시 정(正)을 거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규장각 직각(直閣)이 되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793년(정조 17) 우부승지(右副承知)로 발탁되었고, 좌부승지(左副承知)로 옮겨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794년(정조 18)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는데, 군기를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나, 곧바로 사면되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795년(정조 19) 비변사 부제조(副提調)에 차임되었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1796년(정조 20) 형조 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그때 『소학집성(小學集成)』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는데, 김조순(金祖淳)⋅심상규(沈象奎) 등과 함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임되어, 정조의 문체(文體) 혁신 운동[反正]에 앞장섰다. 조선 시대 문풍(文風)이 송나라 문체를 받아들여 침체하였는데, 정조 때 고문(古文)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798년(정조 22)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한성부 우윤(右尹)이 되었다가,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799년(정조 23) 예조 참판이 되었다가,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는데, 그해 여름에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며, 많은 시문(詩文)을 지었다.

1800년(정조 24)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이 되었는데, 그해 6월에 정조가 49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순조 시대 활동

1800년(순조 즉위) 6월에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정순대비(貞純大妃: 영조의 계비)의 명을 받고 사부(師傅) 김재찬(金載瓚) 등과 번갈아 입시(入侍)하여 순조에게 학문과 정사 요령을 진강(進講)하였다. 도승지(都承知)로 영전되어 어린 순조의 정사를 돕다가,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에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1801년(순조 1)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고,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그해 말에 다시 도승지(都承知)에 임명되었다.

1802년(순조 2) 『정조실록(正租實錄)』을 편찬하는 실록청 당상(堂上)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804년(순조 4) 선공감 제조(提調)가 되었으나, 그해 6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선영(先塋)에서 초막(草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806년(순조 6) 3년 상례를 끝마치고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807년(순조 7) 공조 판서(判書)가 되어, 부묘도감 제조(提調)가 되었고, 예조 판서가 되어,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10월에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중국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는데, 그때 연경에서 조강(曹江)⋅진희조(陳希祖)⋅이림송(李林松) 등 중국 청나라 당대의 유명한 문사(文士)들과 만나서 서로 시문(詩文)을 지어서 서로 주고받았다.

1808년(순조 8)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문관(文官)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 판서를 무려 9차례나 역임하였다. 그 뒤에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09년(순조 9) 예문관 제학(提學)이 되어, 도당(都堂)의 회권(會圈)을 시행하였고,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였다. 이어 공조 판서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규장각 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개성부 유수(留守)로 나갔다.

1811년(순조 11) 목청전(穆淸殿)과 경덕궁(敬德宮)을 봉심(奉審)하였고, 원자(元子: 헌종)의 좌선유(左諭善)에 임명되어, 원자를 가르쳤다. 그 뒤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예문관 제학을 거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12년(순조 12)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그 뒤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병조 판서가 되어,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나오자,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청(淸)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사신관(使臣館)에서 접대하였다. 그 뒤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1813년(순조 13)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세자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세자(世子: 헌종)를 가르쳤다. 그 뒤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규장각 제학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홍문관 제학을 거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어,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였고,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14년(순조 14) 선혜청 제조(提調)가 되어,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였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어,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 그해 6월에 『홍재전서(弘齋全書)』를 교정하고 감인(監印)한 공으로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에 다시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1815년(순조 15) 홍문관 제학이 되어,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그 뒤에 병조 판서가 되어,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겸임하였고, 다시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 이때 남공철이 자기 자신의 문집인 『금릉집(金陵集)』 24권 12책을 취진자(聚珍字)로 간행하였다.

1816년(순조 16) 경의 왕후(敬懿王后: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서 바쳤는데, 그 공으로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에 세자 좌빈객이 되었다가, 세자 우빈객이 되었다.

1817년(순조 17)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그 뒤에 이조 판서를 사임하고, 용산(龍山)의 별장에서 지냈으나,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1818년(순조 18) 내의원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병약한 임금을 보살폈다.

1819년(순조 19) 60세가 되자, 남공철은 청계산(淸溪山)에 묘 자리를 잡아놓고, 자기 자신의 묘갈명(墓碣銘)인 「자갈명(自碣銘)」을 지었다.

1821년(순조 21) 왕대비(王大妃)가 승하하자, 천릉도감(遷陵都監)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장례 절차를 총지휘하였다. 그때 좌의정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총호사(摠護使)를 사직하였다.

1822년(순조 22) 한직인 중추부 판사가 되자, 원고를 정리하여 문집 『영옹속고(潁翁續藁)』 5권 2책과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12권 6책을 전사자(全史字)로 간행하였다.

1823년(순조 23) 2월에 영의정이 임명되어, 부묘도감 도제조가 되었다.

1824년(순조 24) 중추부 판사가 되었고, 1825년(순조 25) 용산(龍山)의 별장에서 한강에 낚시를 하며 시문(詩文)을 지었다.

1826년(순조 26) 나이 67세 때 남공철은 중국 송(宋)나라 문언박(文彦博)의 『낙양(洛陽) 기영회(耆英會)』의 고사를 본 따서, 당시 조정의 나이가 많은 재상 김사목(金思穆)⋅김재찬(金載瓚)⋅한용구(韓用龜)와 함께 <정사(貞社) 사로회(四老會)>를 만들어 정릉방(貞陵坊)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1827년(순조 27)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1828년(순조 28) 순조가 영의정남공철의 양자 남지구(南芝耈)를 특별히 세자익위사 세마(洗馬)에 보임하였다.

1829년(순조 29) 나이 70세 때 남공철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의정남공철이 치사(致仕)하니, 순조가 영의정에서 해면(解免)하였다. 그해 말에 세손(世孫)를 책봉하는 책례도감 도제조(都提調)에 임명되었다.

1830년(순조 30) 중추부 영사(領事)가 되었고, 3도감 도제조가 되었다. 그해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때 문집 『영옹재속고(潁翁再續藁)』 3권 1책을 전사자(全史字)로 간행하였다.

1831년(순조 31) 나이 72세 때 남공철이 다시 치사(致仕)하자, 순조가 영의정에서 해면하고 중추부 영사에 임명하였다.

1832년(순조 32) 양아들 남지구가 경주판관(慶州判官)이 되었다. 그해 여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833년(순조 33) 나이 74세 때 남공철이 다시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때 남공철은 다시 벼슬에 나오지 않으려고, 당호(堂號)를 ‘귀은당(歸恩堂)’이라고 지어서 불렀다.

1834년(순조 34) 문집 『귀은당집(歸恩堂集)』 10권 5책을 취진자(聚珍字)로 간행하였다.

헌종 시대 활동

1840년(헌종 6) 12월 29일에 서울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8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편안하고 간결하며 차분하고 조용하였다. 조정에서 퇴청(退廳)할 때 수레나 말을 타고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었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향(香)을 피우고 서가(書架)에서 책을 찾아서 글을 읽었다. 가끔 명사(名士)들과 만나서 글을 지으며 웃으며 담소하였는데, 풍류와 운치가 그윽하게 풍겼다.[묘지명]

남공철은 1760년(영조 36) 11월 16일에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아버지 남유용(南有容)과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가 임신하였을 때 밤에 옥황상제(玉皇上帝)에게 절을 드리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자갈명] 위로 배가 다른 형인 진사(進士)남공보(南公輔)가 있었는데, 젊을 때 일찍 죽었다. 나이 4세 때에 아버지 남유용이 평안도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부임하자, 남공철은 아버지를 따라서 성천으로 가서 처음으로 아버지이게 글을 배웠다. 나이 10세 때에 어머니 김씨에게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등의 언해본(諺解本)을 배우고,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였다. 나이 13세 때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청주한씨(淸州韓氏) 감사 한용화(韓用和)의 딸과 혼인하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나, 평생 해로(偕老)하였다. 나이 14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아버지 남유용(南有容)은 형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유학자였으므로, 일찍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가르쳤고, 또 정조가 왕세손(王世孫)일 때 사부(師傅)였으므로, 정조가 남공철을 각별히 아끼고 신임하였다.

나이 16세 때, 처음으로 중국 고문(古文)을 배웠는데, 남공철은 중국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문체(文體)와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취향(趣向)을 좋아하여, 그 문장을 익혔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남공철이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을 찾아가서 자기가 지은 글을 보였는데, 황경원이 글을 읽어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말하기를, “고문(古文)이 세상에 명맥이 끊어진 지 오래 되었는데, 그대는 이에 힘쓰도록 하라.”고 격려하였다. 중국에서 당나라 한유의 고문 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송나라 구양수는 "글과 도는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文道合一]"고 주장하였는데, 남공철도 문학과 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보았으며, 또 구양수는 "문으로써 시를 삼아야 한다[以文爲詩]"고 주장하였는데, 남공철도 시와 문의 작법을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은 남공철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여 남공철을 ‘동방(東方)의 작은 한유(韓愈)’라고 칭찬하였고, 순암(醇菴) 오재순(吳載純)은 남공철의 글을 평하기를, “한유(韓愈)의 문체와 구양수(歐陽脩)의 취향을 따랐다.”고 하였다.[자갈명] 한유의 문장이 웅장하지만 글귀가 어렵고 난삽하였으나, 구양수는 그 웅장한 기품을 본받아 호방하지만 글귀가 난삽하지 않고 평이하였기 때문에 남공철은 구양수의 문장을 순정(淳正)하다고 생각하여 한유의 문장보다 구양수의 문장을 더욱 좋아하였다.

1796년(정조 20)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을 때에 『소학집성(小學集成)』을 편찬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그때 정조가 남공철의 문장을 읽어보고 우아하고 고결하며 고법(古法)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남공철은 정조의 문체 혁신 운동에 앞장섰는데, 송나라 구양수의 문체를 널리 보급하였다. 남공필은 평소 구양수의 문장을 본뜨고 그 인간성과 덕성(德性)을 본받으려고 스스로 호를 사영(思潁), 또는 영옹(潁翁)이라고 지어서 불렀는데, 구양수의 고향 영주(穎州)에서 따온 ‘강 이름 영(潁)’자를 자호(自號)로 삼았던 것이다. 송나라 구양수가 만년에 병부 상서(尙書)를 내놓고 고향 영주(穎州)로 돌아가서 자연을 노래하고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남공철도 벼슬을 그만두고 용산(龍山)의 별장(別莊)으로 돌아가서 한강에 낚시를 하며 시문(詩文)을 짓고 여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평소 당대의 문장가 김상임(金相任)⋅성대중(成大中)⋅이덕무(李德懋)⋅김재련(金載璉) 등과 교유하였는데, 그는 문학과 유학을 하나로 보고 시문을 끊임없이 지어서 문집과 저서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독서에 몰두하여, 경전에 통달하였다. 이에 남공철은 조선 후기 제일가는 문장가가 되어, 수많은 금석문(金石文)과 명문(名文)을 남겼다.

남공철의 문집으로는 『금릉집(金陵集)』⋅『귀은당집(歸恩堂集)』⋅『영옹속고(穎翁續藁)』⋅『영은문집(瀛隱文集)』⋅『영옹재속고(穎翁再續稿)』 등이 있는데, 남공철이 생전에 자기 문집을 출간한 점이 아주 특이하다. 저서로는 『독례록(讀禮錄)』⋅『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대동상위고(大東象緯考)』 등이 있는데, 『독례록(讀禮錄)』은 『예기(禮記)』를 읽고 우리나라 예절에 관한 문제를 기술한 책이고,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은 『고려사(高麗史)』를 읽고 중요한 인물의 업적을 간추려서 기록한 책이고, 『대동상위고(大東象緯考)』는 『고려사』를 읽고 천재지변(天災地變)과 고려의 대소 정변의 관계를 점성학(占星學)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서이다. 특히 『대동상위고(大東象緯考)』는 우리나라 천문학과 점성학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는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산(淸溪山)에 있는데,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무덤 앞에 묻었다.[『경산집(經山集)』 권17] 또 남공철이 환갑 때 지은 자신의 묘갈명인 <자갈명(自碣銘)>이 그의 문집 『귀은당집(歸恩堂集)』에 남아 있다.[『귀은당집(歸恩堂集)』 권60] 남공철은 환갑 때 청계산을 답사하고 자기의 무덤 자리를 미리 정하여 놓았을 뿐만 아니라, 견여(肩輿)를 타고 정원용의 집으로 찾아가서 비명(碑銘)을 직접 부탁하였다. 그때 남공철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무덤에 비명(碑銘)을 쓰도록 부탁한다. 옛날 중국의 마범(馬范)도 그렇게 하였다.”하였는데, 남공철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정원용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기를,“내 병이 위독하다. 전일에 부탁한 말을 제발 잊지 말기를 바란다.”하였다.[묘지명]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감사(監司)한용화(韓用和)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양자 남기원(南綺元)은 음서(蔭敍)로 공조 참판(參判)을 지냈는데, 초명은 남지구(南芝耈)였다. 손자 남정헌(南廷獻)는 군수(郡守)를 지냈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고종]
  • 『각사등록(各司謄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가오고략(嘉梧藁略)』
  • 『강재집(剛齋集)』
  • 『강한집(江漢集)』
  • 『경산집(經山集)』
  •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 『경헌집(敬軒集)』
  • 『관암전서(冠巖全書)』
  • 『구정유고(龜亭遺藁)』
  • 『국조보감(國朝寶鑑)』
  • 『귀은당집(歸恩堂集)』
  • 『극원유고(屐園遺稿)』
  • 『금곡집(錦谷集)』
  • 『금릉집(金陵集)』
  • 『나산집(蘿山集)』
  • 『나와집(懶窩集)』
  • 『노주집(老洲集)』
  • 『농암집(農巖集)』
  • 『뇌연집(雷淵集)』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돈암집(敦巖集)』
  • 『두실존고(斗室存稿)』
  • 『만모유고(晩慕遺稿)』
  • 『명암집(明庵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미호집(渼湖集)』
  • 『보만재집(保晚齋集)』
  • 『봉암집(鳳巖集)』
  • 『석재고(碩齋稿)』
  • 『소재집(歗齋集)』
  • 『소호당집(韶濩堂集)』
  • 『송암집(松巖集)』
  • 『송애집(松崖集)』
  • 『수정재집(壽靜齋集)』
  • 『순재고(純齋稿)』
  • 『심암유고(心庵遺稿)』
  • 『심전고(心田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암집(燕巖集)』
  • 『연천집(淵泉集)』
  •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
  • 『운석유고(雲石遺稿)』
  • 『운양집(雲養集)』
  • 『은대조례(銀臺條例)』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저(自著)』
  • 『제호집(霽湖集)』
  • 『존재집(存齋集)』
  •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 『죽천집(竹川集)』
  • 『척재집(惕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집(秋江集)』
  • 『치암집(癡庵集)』
  • 『탁영집(濯纓集)』
  • 『풍고집(楓皐集)』
  • 『풍석전집(楓石全集)』
  • 『해석유고(海石遺稿)』
  • 『호곡집(壺谷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