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지영(廣智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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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광지영 |
한글표제 | 광지영 |
한자표제 | 廣智營 |
관련어 | 창덕궁(昌德宮), 훈련도감(訓鍊都監), 훈국(訓局), 군영(軍營), 숙위(宿衛), 광지문(廣智門), 공북문(拱北門), 집춘문(集春門), 궁장(宮牆)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왕무 |
폐지 시기 | 1882년(고종 19)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광지영(廣智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연산군일기』 3년 5월 23일, 『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숙종실록』 30년 10월 3일, 『정조실록』 20년 11월 13일, 『정조실록』 1년 8월 6일, 『정조실록』 18년 11월 4일 |
창덕궁 북쪽 문인 광지문 밖의 성균관 왼쪽 응봉 아래에 위치했던 훈련도감의 분영.
개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때 국방력 강화를 위해 설치하였다.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친 이후에는 국방보다 왕과 궁궐의 호위에 치중하였다. 훈련도감의 궁궐 호위는 궁장(宮牆) 인근에 군영을 설치하고 숙위를 담당하는 체제였다. 궁궐의 숙위와 궁장을 지키는 체제는 조선전기부터 있었으나 군영이 담당하게 된 것은 훈련도감을 설치한 이후부터이다. 훈련도감이 궁장 인근에 세운 군영 가운데 창덕궁에 둔 것이 광지영(廣智營)이었다. 광지영이 위치한 곳은 창덕궁 북쪽 문인 광지문(廣智門) 외부의 응봉(鷹峰) 아래였다. 광지문 인근은 조선전기부터 창덕궁 숙위를 위한 군인들을 배치하였던 곳이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지영은 훈련도감에서 창덕궁의 궁장 숙위를 항구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세운 분영(分營)이었다. 광지문 외부의 위치가 창덕궁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이에 있었기 때문에 영(營)을 설치해서 파수했다. 그런데 군사들이 궁궐의 내부를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군영의 입구는 궁의 반대편으로 설치하였다(『연산군일기』 3년 5월 23일). 인조대인 1633년(인조 11) 겨울에 훈련도감의 장관(將官)과 군병이 흙집과 가가(假家)를 만들어 입직하면서 시작하였다. 광지영은 6칸의 건물로 정비하였고, 이후 115칸으로 확대 조성하였다.
조직 및 역할
광지영에 파견된 훈련도감의 군인은 50명이었다. 이 군인들은 포수였으며 영조대인 1728년(영조 4)에 50명을 추가하여 100명이 되었다. 광지영은 훈련도감이 궁궐을 숙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훈련도감이 창덕궁에서 담당한 숙위는 궁궐의 문과 담장을 위주로 하였다. 돈화문(敦化門)에서 명례문(明禮門)까지는 금호문(金虎門)에 입직한 훈련도감군이 담당하였고, 공북문(拱北門)에서 집춘문(集春門)까지는 광지영의 군인들이 맡았다. 궁장의 숙위는 1경(更)씩 나누어 진행했으며 5경이 되어 파루(罷漏)의 종이 울리면 끝났다.
변천
현종대에는 훈련도감 군병 이외에 다른 군영의 군병들이 광지영에서 입직하였다. 1663년(현종 4)에는 총융청 2번(番) 장초군(壯抄軍) 338명이 와서 점호를 받고 광지영에서 입직하였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숙종대인 1704년(숙종 30) 광지영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신종(神宗)의 사단(祀壇)인 대보단을 설축(設築)하려 했다. 그런데 광지영의 지세(地勢)가 좁다는 이유로 내빙고(內氷庫) 자리로 정해서 광지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숙종실록』 30년 10월 3일).
광지영은 궁궐 담장이 무너진 곳의 임시 수비를 맡는 임무도 하였다. 여름의 장마철이나 봄철의 해동기에는 언제나 광지영이 담당하던 궁장들이 무너져 내렸다. 특히 광지영의 서쪽 편 궁장이 잘 무너졌다. 궁장이 무너지면 복원하기까지 자문감(紫門監)에서 우선 임시 가림막인 파자(把子)를 설치했으며, 광지영의 군사들이 파견되어 궁장이 완성될 때까지 파수를 섰다. 예컨대, 광지영군이 담당하는 구역 내에 무너진 곳이 있으면 파수꾼을 1칸에는 8명, 2칸에는 10명, 3~4칸에는 15명, 5~6칸에는 20명을 두었다. 만일 20명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번을 나온 군병을 상주하여 파수꾼을 증가시켰다. 5일씩 간격을 두고 장교를 보내어 부정을 적발하고, 사고의 유무를 무비사(武備司)에 보고하였다. 또한 1796년(정조 20)에는 응봉 근처에 호환(虎患)이 발생하자 광지영 등의 군병을 동원하여 호랑이 사냥을 하고자 했다(『정조실록』 20년 11월 13일).
정조대에는 궁궐의 숙위 체제가 강화되고 변화되어 광지영의 군병에도 변화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인 1777년(정조 1)에 훈련도감군 중에서 흥화문(興化門)의 군사 100명을 금호문으로 옮기고, 내입(內入) 군사 100명을 홍화문(弘化門)과 숭의문(崇義門)으로 옮기며, 훈국(訓局) 출신 45인을 영숙문(永肅門)으로 옮기고, 동영(東營)의 군사 50명을 집춘영(集春營)으로 옮기며, 서영(西營)의 군사 50명을 광지영으로 옮기고, 북일영(北一營)의 마병(馬兵) 50명을 남영(南營)으로 옮기며, 신영(新營)의 칠색군(七色軍) 40명을 북영(北營)으로 옮기도록 했다(『정조실록』 1년 8월 6일).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된 이후에는 궁장 숙위에도 변화가 있었다. 장용영의 군사는 홍화문에 직숙하고, 훈련도감의 군사는 서영과 광지영에 직숙하고, 금호문에 추가로 들여보낸 군사는 동룡문(銅龍門)에 직숙하고, 총융청의 군사는 동영에 직숙하고, 수어청의 군사는 집춘영(集春營)에 직숙하게 하여 금위영과 어영청 두 군영의 향군(鄕軍)이 번서는 것을 정지하게 된 것을 대체하게 하였다(『정조실록』 18년 11월 4일).
참고문헌
- 『대전통편(大典通編)』
- 『금위영등록(禁衛營謄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
- 『훈국등록(訓局謄錄)』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 연구』, 혜안, 2003.
- 김종수, 「17세기 訓鍊都監 軍制와 都監軍의 활동」, 『서울학연구』2, 1994.
- 김종수, 「朝鮮後期 訓鍊都監의 設立과 運營」,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원영환, 「朝鮮 後期 都城修築과 守備에 대하여」, 『향토서울』33, 1975.
- 윤훈표, 「조선후기 동궐의 숙위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幸行時 궁궐의 宿衛와 留都軍 연구」, 『군사』62, 2007.
- 차문섭, 「朝鮮後期 中央軍制 再編과 首都防衛」, 『朝鮮時代 軍事關係硏究』, 단국대학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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