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원(經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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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안에 설치되어 유학 교육을 담당하던 기구.

개설

1880년대 동도서기적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교육 정책 개혁이 추진되었다. 육영공원·배재학당·이화학당 등 신식 학교가 설립되는 한편,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학 교육 기관의 개편 논의도 일어났다. 그 결과 1887년(고종 24) 서울성균관 안에는 경학원(京學院), 지방에는 영학원(營學院), 관학원(官學院)을 두고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들 기관을 통칭하여 경학원(經學院)이라고 하였다. 정부는 경학원 설립 이후 일정하게 지원 노력을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1894년(고종 31)에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약화되었다. 1895년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일부 되살아났으나 경학원의 이름은 경학과(經學科)로 바뀌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학원이 설치된 것은 1887년(고종 24)으로, 이는 성균관의 부실화에 그 원인이 있었다. 즉 같은 해 7월 내무부(內務府)에서는 성균관의 인재 양성과 교화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우려하였다. 그렇게 된 원인으로는 경비가 군색한 것 외에도 관리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한 것을 들었다(『고종실록』 24년 7월 20일). 이때 조정에서는 지방에도 새로운 유학 교육 기관을 설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서울에는 경학원, 각 도에는 영학원, 여러 읍에는 관학원을 설립한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를 통칭해서 경학원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학원의 설치는 종래 유학 교육이 제한되어 있었던 함경도, 평안도 지방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되었다.

이처럼 경학원은 성균관의 개편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정부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식 학교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도 작용하고 있었다. 1887년 3월에는 신식 학교인 육영공원에 비해 성균관에 대한 지원이 박하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다(『고종실록』 24년 3월 29일).

조직 및 역할

조선 정부는 경학원의 교육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만들고 일정하게 지원하였다. 먼저 경학원의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전임 대제학, 현임 및 전임 문임(文任), 성균관의 당상관, 대사성의 아들·사위·아우·조카 가운데서 각각 2명씩 추천하게 하였다. 또한 교사로는 특별히 학문에 업적이 있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선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초기에는 4부 학당의 교수가 순서대로 경학원에 머물면서 규정대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종실록』 24년 10월 27일).

변천

경학원을 통해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활성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시련을 맞게 된다. 갑오개혁을 통해 과거 제도가 철폐되고 새로운 관리 등용법이 마련되고, 교육 개혁도 소학교를 중심에 둔 채 고등 교육은 일본 유학으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성균관은 사실상 인재 양성의 교육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이후 1895년, 1896년 고종이 점차 권력을 회복하면서 성균관을 고등 교육 기관으로 만들었다. 유학 전통적 학과목 외에 역사, 지리 등 근대적 학문도 도입하고자 했다. 이때 경학원의 이름은 경학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균관 개편 시도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나아가 병합 직후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다시 말살하고, 제사[享祀] 기능만을 유지시켰다. 또한 유학 세력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강연회 등을 통해 성균관을 체제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이렇게 총독부가 성균관의 기능을 바꾸면서 부여한 이름도 경학원이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임광수 편, 『정통과 정체성: 서울대학교 개교 원년, 왜 바로 세워야 하는가』, 삶과꿈, 2009.
  • 정일균,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학원」, 『사회와 역사』76, 2007.
  • 구희진, 「한국 근대개혁기의 교육론과 교육개편」,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 유방란, 「한국근대교육의 등장과 발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