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문(建陽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태종대에 건립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

개설

건양문(建陽門)은 창덕궁을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궁의 동쪽 담장에 있는 문이었으나, 성종대에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두 궁의 경계 영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공식적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꼭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건양문 옆에는 숙위소(宿衛所)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문으로 창경궁으로 왕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건양문은 태종대에 창덕궁 조성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문의 액호(額號)가 없었다. 건양(建陽)이라는 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에 지어졌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건양문은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두 궁궐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성종실록 』 14년 3월 3일). 창덕궁의 동쪽 궁장문(宮牆門)으로 동궁(東宮)과 지근거리에 위치하게 되자 원자(元子)가 천연두를 앓을 때 사람의 왕래를 금한다는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16년 2월 4일)(『연산군일기』 5년 1월 27일).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경계에 있었으며 왕래하는 사람들은 통행 부신(符信)을 발급받아야만 했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0일). 건양문은 창덕궁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대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그 위치가 임진왜란 이전과 동일한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후기의 궁궐 그림을 살펴보면,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왕래할 수 있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인조실록』 23년 9월 19일)(『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이 때문에 잡인들이 많이 드나들자, 영조와 정조는 건양문에 입직하는 군사를 늘리고 숙위소를 설치하였다(『영조실록』 5년 9월 11일)(『정조실록』 1년 11월 15일).

조선후기까지 있었던 건양문이 훼철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1830년(순조 30)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東闕圖)」에서 건양문의 형태를 살펴보면,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에 용마루에 용두(龍頭)가 설치된 격식 있는 문이다. 기둥과 문짝은 붉은색으로 단청하였으며 좌우로는 궁장이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 『대동지지(大東地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