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가취조(居喪嫁娶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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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나 남편의 상중에 혼인을 금지하고, 만약 어길 경우 당사자와 주혼자 등 관련자를 처벌하는 조항.

내용

흉례(凶禮)인 상중에는 근신하여야 하므로, 상중에 혼례를 거행하는 것은 윤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금지하였다. 이는 『예기(禮記)』 등 유교 경전에서 시작하여 당률(唐律)과 원(元)의 법전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도 규정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당률의 영향을 받아 이에 대한 규제가 있었다.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호율(戶律)」 호혼(戶婚) 거상가취조(居喪嫁娶條)에 따르면 규제 행위와 형벌은 다음과 같다. 부모나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혼인을 하면 장(杖) 100으로 처벌하고, 첩을 들이거나 처나 딸이 첩이 되면 2등을 감경하여 장 80으로 처벌하였다. 조부모·백숙부모·고모·형·손위 누이의 상에 혼인을 하면 장 80으로 처벌하였다. 부조(父祖) 등 주혼자(主婚者)는 장 80으로 처벌하였다. 그리고 명부(命婦)가 남편 사후에 재가(再嫁)하면 같게 처벌하고 봉호(封號)를 삭탈하고 강제로 이혼시켰다. 혼인을 한 상대방의 경우는 알고서 한 경우에만 5등을 감경하며, 알지 못한 자는 처벌하지 않았다. 부인의 경우, 남편이 3년상이 끝난 다음에 본인은 수절(守節)하기를 원하였으나 그의 조부모·부모가 아닌 자가 강제로 개가를 하게 하면 장 80으로 처벌하였으며 기복친(朞服親)의 경우에는 2등을 감경하여 장 60으로 처벌하였다. 부인은 처벌하지 않고, 전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 수절하도록 하였으며, 장가를 든 자는 처벌하지 않고, 폐백(幣帛)도 돌려주었다.

고려시대에는 100일 탈상(脫喪)의 관행 때문에 100일이 지나면 혼인을 할 수 있었다. 조선초기에 3년상을 이행하기 위하여 1399년(정종 1)의 사건을 계기로 향후 혼인을 금지하였고, 1404년(태종 4)에 부모 3년상 기복친 100일 내에는 금지하였다. 실제의 규제 기간은 100일상과 3년상의 실천에 따라 달랐다.

남자의 재혼(再婚)은 원칙적으로 3년상이 지난 후에야 가능하였으나, 가계 계승과 효도를 중시하여 부모의 명이 있거나 아들이 없는 40세가 넘은 자에 대해서는 1년이 지나면 혼인을 허용하였다. 이는 『경국대전』「예전」 혼가(婚嫁)조에 수록되었다.

『대명률』에는 친상(親喪)만으로 국한되었으나, 조선초기에는 국상(國喪)에까지 확대되었다. 1419년(세종 1)에 송(宋)의 제도인 국상 역월제(易月制)에 따라 담제(禫祭) 이후에는 혼인을 허용하였으며, 1423년(세종 4)에는 졸곡(卒哭) 전에는 금혼하였다.

조선초기 주자가례(朱子家禮)와 대명률의 수용에 따라 상중 혼인에 대한 규제가 확립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상중 혼인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남자가 처 사후 1년 이내에 부모의 명을 핑계대고 재혼을 하는 예가 있었다.

용례

義禁府啓 前節度使慶由恭 國喪三年內 欲奪魚有沼媒約女爲妾罪 比大明律居喪嫁娶條 凡居父母喪 而身自嫁娶者 杖一百 若男子居喪娶妾者 減三等 右由恭往坡州官 與牧使相會 止宿客舍 耗費公廩罪 依大典 私出入官府者 杖一百 從重 杖一百收贖 告身盡行追奪 命只收告身 外方付處(『성종실록』 15년 11월 28일)

참고문헌

  •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 鄭肯植, 「朝鮮初期 朱子家禮規範의 受容에 관한 考察 - 喪禮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 鄭肯植, 「朝鮮初期 居喪行爲의 規制(上)」, 『法史學硏究』10, 한국법사학회, 1989.
  • 鄭肯植, 「高麗時代 居喪行爲의 規制 -高麗律을 중심으로-」, 심당송상현선생화갑기념논문집 『이십일세기 한국상사법학의 과제와 전망』, 박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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