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전(長樂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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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에 위치한 대비의 전각.

개설

대비는 국왕의 어머니로서 궁중의 많은 일을 결정했다. 따라서 대비의 전각은 생활공간일 뿐 아니라, 행사를 위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경희궁에 위치한 장락전 역시 대비의 생활공간이면서 간택과 같은 왕실 행사를 거행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장락전은 2층 누각 건물을 양쪽으로 거느리고 널찍한 앞마당을 두어 대비의 존엄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위치 및 용도

경희궁의 북동쪽 영역에 위치한다. 장락전 남쪽으로는 어조당(魚藻堂)이 있고, 서쪽으로는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장락전은 대비가 머물며 생활하던 공간인데, 영조가 대비를 만나러 장락전에 여러 차례 거둥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장락전에서는 간택과 같은 중요한 왕실 행사가 있었는데, 1819년(순조 19)과 1844년(헌종 11)에 간택 장소로 사용하였다(『순조실록』 19년 윤4월 29일)(『헌종실록』 10년 9월 10일).

변천 및 현황

정확한 건립 연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영조 이후의 기록에서 장락전이 자주 나온다. 경희궁은 광해군대에 지어져서 숙종대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다. 숙종대 경희궁을 수리한 기록인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에는 장락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이름이 장락전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궁궐지(宮闕志)』에는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냈던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1829년(순조 29)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경희궁의 전각을 복구한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에서 장락전을 볼 수 없고 1844년(헌종 10)에 장락전에서 간택을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락전은 경희궁에 있었던 대화재를 면한 채로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훼철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형태

장락전은 봉상루(鳳翔樓)와 용비루(龍飛樓)를 양쪽에 두어서, ㄷ자 형태의 건물군을 이루고 있다. 봉상루는 장락전의 우측에 있는 누각이다. 봉상루 아래층을 백상헌(百祥軒)이라고 한다. 용비루는 장락전의 좌측에 있는 누각이다. 용비루 아래층을 경의헌(敬義軒)이라고 한다. 경의헌은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던 곳이다. 장락전 앞마당에는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장락전은 1819년에 세자빈의 간택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때 간택된 이가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신정왕후는 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차남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4년에는 헌종 계비의 간택 장소로 사용하였다.

1834년에는 순조 사후에 빈전으로 사용되었다(『순조실록』 34년 11월 16일). 1836년(헌종 2) 태묘(太廟)의 증수(增修) 공사가 있었는데 이때 경희궁의 장락전과 광명전(光明殿)에 나누어 신주를 임시로 봉안하였다(『헌종실록』 2년 1월 10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경희궁 영조 훼철관련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연구』, 서울특별시, 2004.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