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고탑(寧古塔)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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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영고탑 |
한글표제 | 영고탑 |
한자표제 | 寧古塔 |
관련어 | 누르하치([老乙加赤, 奴兒哈赤], Nurhaci), 동해여진(東海女眞),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 영고탑회귀설,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지명 |
지역 | 중국 |
시대 | 청나라 |
왕대 | 청나라 |
집필자 | 박정민 |
관할 지역 |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영고탑(寧古塔)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5년 2월 2일, 『효종실록』 5년 7월 2일, 『효종실록』 6년 4월 23일, 『숙종실록』 23년 5월 18일, 『숙종실록』 23년 6월 3일 |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에 있는 청대의 도시.
개설
영고탑은 현재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로, 청대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의 관할지였다. 조선초기에는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의 주 거주지였고, 회령과 경원 일대를 자주 침략하였던 세력이었다. 누르하치([老乙加赤, 奴兒哈赤], Nurhaci)에 의하여 편입된 후, 청의 주요 거점지로 기능하였다.
형성 및 변천
원래 영고탑이 있던 지역은 조선시대 혐진올적합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이후 『만주실록』에는 동해여진(東海女眞)으로 기록되어 있다. 1610년에 누르하치가 영고탑 지역을 복속하였고, 이후 남은 동해여진과 흑룡강 유역을 복속시키기 위한 전진기지로 영고탑을 활용하였다. 결국, 1636년에 정식으로 후금(청)의 주둔기지인 주방(駐防)이 영고탑에 설치되었다.
청조는 입관(入關) 이래 요녕 지역에 유조변(柳條邊)을 설치하고, 만주 지역을 총괄하는 지휘관들의 지위와 체계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개편하였다. 1652년(순치 9)에 최종적으로 유조변 안팎의 만주 지역을 진수성경경성총관(鎮守盛京京城總管, 개명 성경장군)과 영고탑총관(寧古塔總管, 개명 영고탑장군)이 분할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17세기 중반 무렵 러시아가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며 영고탑의 위상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영고탑은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한 후방 기지의 역할을 하였으나, 지리적 요건 등으로 그 자리를 길림(吉林)에 넘겨주었다.
위치 비정
영고탑은 현재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시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1666년에 신성(新城)으로 옮긴 것으로, 그 이전에는 구성(舊城)에 있었다. 구성은 현재의 시가지에서 50여 리(약 20km) 북쪽에 위치한 영안시 영안진 고성촌(古城村)이다.
한편, 누르하치의 고향이자 후금 개국의 지역인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일대의 지명도 영고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명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만주실록』 등에 6을 뜻하는 ‘닝구(ninggu)’와 ‘머리’나 ‘수령’을 의미하는 만주어 ‘다(da)’의 고형태 혹은 이형태인 ‘타(ta)’가 결합하여 ‘여섯 수령(ningguta)’을 의미하게 된 용어로 추정된다. 하지만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에는 임고타(林古打)라는 지명이 등장하여 영고탑을 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후대의 사료들이 누르하치 당대에 대한 지리 지식의 부족에 따른 오해일 가능성이 높다.
관련 기록
17세기 중반에 러시아가 흑룡강 쪽으로 남진하여 청과 충돌하였다. 청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1654년(효종 5) 2월에 청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총 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조선은 영의정정태화의 의견에 따라 북우후(北虞候)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기고수(旗鼓手) 등 50여 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효종실록』 5년 2월 2일).
조선군은 같은 해 4월에 영고탑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흑룡강 방면으로 내려가서 28일부터 러시아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군은 5월 16일에 회군하여 6월에 돌아왔다(제1차 나선정벌)(『효종실록』 5년 7월 2일)(『효종실록』 6년 4월 23일).
한편, 조선에서 영고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숙종대였다. 1673년(현종 14) 11월에 청에서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그 여파로 조선에서 청조가 멸망할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퍼졌다. 즉, 과거 오랑캐가 세운 국가는 100년을 넘기지 못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 따라 청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청이 망할 경우 만주족의 고향인 영고탑으로 돌아갈 때, 조선의 북쪽을 통하여 돌아서 영고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영고탑회귀설’이 유행하였다. 조선은 당연히 여기에 관심을 갖고 각종 정보를 수집하며 촉각을 기울였다(『숙종실록』 23년 5월 18일)(『숙종실록』 23년 6월 3일).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은 평안도 연변 일대 등의 방어 체제를 다시 구축하며 대비하였으나, 이것은 잘못된 소문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동사강목(東史綱目)』
- 『연행록(燕行錄)』
- 『계산기정(薊山紀程)』
- 『임하필기(林下筆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담헌서(湛軒書)』
- 『영고탑총람도(寧古塔總覽圖)』
- 김석주·김남신, 「영고탑에 대한 역사지리적 고찰」, 『문화역사지리』 11, 2010.
- 유지원, 「淸代 前期 東北의 邊城 寧古塔-建置過程 및 住民生活의 變化를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11, 1999.
- 홍성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비친 17세기 내륙아시아 정세와 ‘영고탑회귀설’」, 『중국사연구』 69, 201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