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토(老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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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일대에 세거하던 여진족의 추장 로툰([羅屯], lotun)의 한자 이름.

개설

로툰([羅屯], lotun)은 두만강 내지 부령(富寧) 무산보(茂山堡)의 대안인 내하(內河, [dorgi bira]) 일대에 세거한 타타라([他塔喇], Tatara)씨의 여진족이었다. 명의 위소(衛所)로는 모린위(毛憐衛)에 해당하는데, 조선의 여진 종족 구분으로는 올량합(兀良哈)이고 청측 자료에서는 와르카([瓦爾喀], Warka)로 나타났다. 노동(老佟)·노둔(老屯)·라둔(羅屯) 등으로도 나타나며, 『만문노당』에서는 로오톤(looton)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로툰을 의미하는 노토의 앞 글자인 ‘老(노)’에 오랑캐를 이르는 ‘胡(호)’ 혹은 추장을 이르는 ‘酋(추)’를 더하여 ‘노호(老胡)’·‘노추(老酋)’로 기재한 경우도 여러 차례 확인되었다. 로툰의 타타라씨는 200여 년 가까이 조선의 관직을 받으며 세거하였는데, 1600년 조선의 공격을 받은 뒤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무산~회령 일대로 돌아와 누르하치에게 후원을 받으며 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가계

로툰의 가계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9명의 아들을 두었다(『선조실록』 36년 6월 4일). 맏아들인 아로(阿老)는 누르하치의 사위였고, 그 밖에 칭지사(稱只舍) 등의 이름이 확인되지만 분명하지 않다. 『팔기만주씨족통보』에 따르면 로툰의 아들 니탕가([尼唐阿], nitangga)와 조카 안숭가(安充阿) 등은 로툰의 건주여진 귀부 이후 만주 팔기의 니루 어전(牛彔額眞)이 되었다. 로툰은 누르하치 일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진다(『선조수정실록』 36년 8월 1일).

활동 사항

로툰은 두만강 상류 무산 일대에 대대로 거주하였던 여진 타타라씨의 추장이었다. 그의 선대에 대한 기록은 현재 확인되지 않아 구체적인 사항들은 알 수 없으나, 조선의 관직을 받고 생활하였음은 분명하다. 로툰의 부락이 위치한 무산 일대는 부령과 회령 일대에서 함경도의 내지로 들어올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므로 조선의 위협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 가등청정(加藤淸正)은 함경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두만강을 건너 로툰 부락을 공격하였다고 전해진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159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건주여진(建州女眞)을 방문한 신충일(申忠一)의 보고서인 『건주기정도기』에는 모린위의 추장 로툰이 전마 70필과 돼지가죽 100여 장을 바치면서 투항하였다고 나타나기도 한다(『선조실록』 29년 1월 30일).

로툰의 활동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1985년 여름 무렵 로툰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이일(李鎰) 등에게 누르하치의 침입 위협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1일). 당시 누르하치는 홀라온(忽剌溫)의 추장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가 두만강 유역의 조선 번호(藩胡)들과 연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일대를 공략하고 있었다. 로툰은 도추장(都酋長)으로 불리면서 누르하치·부잔타이 등과 일찍이 관계를 맺은 바 있었지만 두만강 상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로툰은 누르하치·부잔타이 등의 복속 요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조선에 협력을 요청하고 점차 조선 내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로툰은 조선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경계를 침범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들을 몰아내려는 조선의 토병들을 살해하였다(『선조실록』 32년 3월 28일). 조선에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로툰의 부락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신중론으로 인하여 실행되지는 않았다. 1600년 3월 로툰의 무리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여진 군사들이 부령의 차동(遮洞)으로 침범하는 과정에서 부령 부사이간(李侃)과 전투를 벌이는 일이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3년 4월 8일). 조선에서는 로툰의 지속적인 변경 침범을 저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로툰 및 그의 인근에 거주하던 여진 부락들을 초토화시켰다(『선조실록』 33년 5월 8일). 로툰은 조선의 정토를 받은 이후 함경남도의 혜산진(惠山鎭)으로 이주한 뒤 건주여진으로 귀부하였다. 로툰은 같은 해 건주여진의 군사들과 함께 회령(會寧) 인근의 번호들을 공략하였고 이 과정에서 보을하진(甫乙下鎭) 첨사(僉使)구황(具滉)이 살해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3년 7월 17일). 로툰은 무산에 다시 투항하였지만, 지속적으로 회령 지역의 번호들과 갈등을 겪어 조선의 변경을 긴장시켰다(『선조실록』 35년 7월 10일)(『선조실록』 36년 6월 4일). 조선에서는 로툰이 일으키는 변방의 사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무산을 보(堡)에서 진(鎭)으로 올리고, 병마만호(兵馬萬戶)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격시킨 뒤, 호시(互市)를 개설하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로툰은 두만강 유역의 번호들을 지속적으로 공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과의 갈등이 짙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맏아들 아로 등이 조선에 투항하는 등의 사건도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8년 5월 4일). 조선에서는 이때 아로를 처형하여 로툰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로툰은 누르하치에게 군대를 청하여 복수를 시도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8년 7월 4일). 로툰은 누르하치는 물론 부잔타이와도 일정한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조선과의 관계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는데, 1607년 오갈암(烏碣巖) 전투에서 건주여진의 강력한 힘이 입증된 이후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투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월사집(月沙集)』
  • 『북관지(北關誌)』
  • 『북로기략(北路紀略)』
  • 『만문노당(滿文老檔)』
  •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
  • 『만주실록(滿州實錄)』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4.
  • 서병국, 『선조시대 여직교섭사연구』, 교문사, 1970.
  • 이선희, 「길상사건을 통해 본 17세기 초 향화호인 관리 실태와 한계-향화인등록을 중심으로」, 『동양고전연구』 37, 동양고전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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