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장(羅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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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칠반천역(七般班役)의 하나로, 경아전(京衙前) 중 서반아전(西班衙前)에 속하여 경찰·순라·옥졸(獄卒) 등의 임무를 맡은 하례(下隷).

내용

나장(羅匠)은 의금부·형조·사헌부·사간원·오위도총부·전옥서·평시서 등에 속하여, 경찰·순라의 일과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 문초할 때 매를 때리는 일, 귀양 가는 죄인을 압송하는 일 등을 맡았다. 보통 깔때기를 쓰고 까치등거리를 입었으며, 손에 주장(朱杖)을 들고 다녔다. 소유(所由)·사령(使令)·창도(唱導) 등으로 불렸다. 농민에서 차출되었으며, 3교대로 나누어 1개월씩 복무하는 당번 인원이 460인이었다. 그중 의금부에 배속된 인원이 240인이었다.

조예(皁隸)·일수(日守)·조군(漕軍)·수군(水軍)·봉군(烽軍)·역보(驛保) 등과 더불어 칠반천역의 하나로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고되어 흔히 피역하려 하였다. 16세기부터 입역(立役) 조건이 급격히 악화되자, 피역 저항이 심해졌고 대립(代立)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그 후 나장의 대립제는 고립제(雇立制)로 전환되었다. 1623년(인조 1) 나장의 부역 의무자가 도망함으로써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정부에서는 경기·충청·황해의 3도에서 경작지 1결당 쌀 3되[升]씩 거두어 조예·나장의 고립가(雇立價)에 충당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품삯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나장을 고용하는 고립제가 시행된 것이다.

용례

兵曹啓 騎正兵 雖非取才軍士 初以人馬壯實者抄定 鍊習武藝 則皆爲有用之兵 而無試才勸懲之典 故專不習射 不知操弓者多有之 名存實無 至爲可慮 今後本曹入直堂上 同都摠府堂上 各於入番日試射 連三次專不能射者 近道則定羅將皂隷 遠道則定水軍何如 從之(『성종실록』 4년 11월 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강만길,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한길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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