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군(金浦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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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김포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김포군(金浦郡)은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소속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1198년(고려 신종 1)에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현(縣) 단위로서 용인·영평·양천·진위 등과 함께 현령 소재지가 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김포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관할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김포군은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고, 1198년(고려 신종 1)에 현령으로 승격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생부인 원종과 그 비인 인헌왕후의 장릉(章陵)이 김포에 조성된 뒤에 김포군으로 승격되었다(『인조실록』 10년 5월 8일). 김포군은 1394년(태조 3)에 경기우도에 소속되었으며, 1414년(태종 14)에 일시 부평부에 병합된 때를 제외한 전 시기에 걸쳐 군수(郡守)가 통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에는 문종 때 관제를 정하여 현에는 7품 이상의 현령을 두었다. 1354년(고려 공민왕 2)에 경관 7품 이하로 했다가 뒤에 안집별감(安集別監)으로 이름을 고쳐 5품 혹은 6품의 관리를 임명하였다. 창왕 때 다시 고쳐 현령이라 하고 품계는 그대로 5품 혹은 6품으로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5품의 현령과 종9품의 훈도 각 1명을 두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으나, 모두 무록관이기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향약이 활발해지면서 조선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김포가 군으로 승격되어 종4품의 군수가 파견되었음이 법전에 실린 것은 『속대전』 때부터였다.

변천

김포군은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된 이후, 1198년(고려 신종 1)에 김포에 왕의 태를 묻었기 때문에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1414년(태종 14)에 양천을 폐지시키고 김포에 병합하여 김양(金陽)이라 하였다. 그 뒤에 양천을 금천(衿川)에 합병하고, 김포는 부평부에 병합시켰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켜서 현령을 두었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생부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을 조성한 뒤에 비로소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김포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김포현(金浦縣)
  • 『속대전(續大典)』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