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현(金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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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금성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금성 지방을 통치하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초기에 삭방도(朔方道) 금성군(金城郡)으로 편제되었으나, 이어서 현으로 강등되어 교주(交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고려중기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고, 이어서 현령(縣令)이 파견되면서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금성현으로 현령이 파견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서 회양도(淮陽道)의 우익(右翼)으로 편제되었고, 진관(鎭管) 체제에서 회양진(淮陽鎭)에 귀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모성(母城) 또는 야차홀(也次忽)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익성(益城)이라 하였다가 말엽에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10도제에서 금성군은 삭방도에 편제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성현으로 강등되었고, 교주의 속현이 되었다. 1106년(고려 예종 1)에 감무를 두었고, 이어서 현령이 파견되어 주현으로 승격되었다. 고종 때 다시 감무를 두고 도영(道寧)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다시 금성현(金城縣)으로 개칭하고 현령을 두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 체제에 따라 회양도를 설치하고, 회양(淮陽)은 중익(中翼)으로, 김화(金化)는 좌익(左翼)으로, 금성(金城)은 우익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 체제에서 회양진에 귀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 현령과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치하였다. 현령은 6품 음관(蔭官)직이었다. 현령 예하에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2인을 두었다. 6방(六房) 관속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군관(軍官) 30인, 아전(衙前) 23인, 지인(知印) 18인을 두었다. 그리고 관노(官奴) 61명, 관비(官婢) 37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객사(客舍), 아사(衙舍), 이화당(梨花堂), 군기고(軍器庫), 향청(鄕廳), 훈련청(訓練廳), 작청(作廳), 현사(縣司) 등에 배속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분할되었다. 아울러 군현제가 폐지되고 각 고을은 군으로 단일화되었다. 이때 금성은 춘천부 산하의 군으로 편성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강릉부와 춘천부는 합쳐 강원도가 되었다. 이때 금성군은 강원도에 편제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동읍지(關東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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