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현(金溝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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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설치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본래 백제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금구로 고치고 전주에 속하였다. 고려 1170년(고려 의종 24)에 이의방(李義方)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현령관(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1409년(태종 9)에 금구현이 관할해 오던 1현 1향 1소 1부곡을 폐지하여 금구현에 편입하였다. 1455년(세조 1)에는 금구가 전라도 전주도(全州道)의 중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금구가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전주진(全州鎭)에 속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금구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1170년에 이의방의 외향이라 하여 현령관으로 승격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한 후에도 이것이 이어졌다.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금구현이 관할해 오던 1현 1향 1소 1부곡이 폐지되어 금구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1현은 거야(巨野)인데 고려에서 전주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나중에 금구현에 소속시킨 곳이다. 1향은 종정(從政)이고, 1소는 역양(櫟陽)이며, 1부곡은 대율(大栗)이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구현에 종5품 현령(縣令)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령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금구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변천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금구현을 전라도 전주도의 중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금구현은 전주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전주거진이 전라중영(全羅中營)으로 바뀌었다. 전라중영의 속읍은 전주·김제·고부·진안·임실·금구·만경·부안 8곳이며,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454명, 당보군(塘報軍) 59명, 수솔군(隨率軍) 689명으로 되어 있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금구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북도는 수부(首府)를 전주에 두었으며, 금구군을 비롯한 26개 군으로 편성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김제시사』, 김제시사편찬위원회, 1995.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