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빈김씨(恭嬪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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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577년(선조 10) = 25세].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의 후궁이자,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어머니.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김희철(金希哲)로 영의정과 해령부원군(海寧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권장(權璋)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김종수(金從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김세균(金世鈞)이다.

선조의 후궁

김공빈(金恭嬪)은 1573년(선조 6)을 전후하여 입궁하여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숙의(淑儀)로 있던 1575년(선조 7) 선조의 첫 번째 아들이 임해군(臨海君)을 낳았고(『선조실록』 7년 1월 2일), 그 공으로 종1품 귀인(貴人)에 봉해졌다.(『선조실록』 7년 1월 15일) 이어 이듬해인 1576년(선조 8) 둘째 아들인 광해군(光海君)을 낳은 후 정1품 공빈(恭嬪)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출산한 이후 산후병에 걸려 결국 1577년(선조 9)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선조실록』 10년 5월 27일)

김공빈은 살아있을 때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선조의 다른 후궁들이 외면당하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자신의 병이 위독해지자 선조에게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으며, 왕이 이를 제대로 조사해주지 않아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김공빈이 죽은 후 선조는 후궁들을 매몰차게 대하였는데, 이 때 김소용(金昭容 : 훗날 김인빈(金仁嬪))이 왕을 극진히 모셔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또한 그녀가 죽은 김공빈의 허물을 자꾸 선조에게 이야기하였고, 이로 인해 선조는 점차 김공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지우게 되었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10년 5월 1일)

광해군의 즉위와 추숭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김공빈의 둘째 아들이었던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광해군은 자신의 친모인 김공빈을 추숭하기 위한 작업들을 진행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임해군의 집에 모시고 있던 김공빈의 신주를 효경전(孝敬殿)에 옮기고자 하였으나,(『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이항복(李恒福)의 건의에 따라 광해군이 즉위 전 있던 잠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백사집(白沙集)』 권3] 또한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 2월에는 김공빈의 묘를 개수하도록 지시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2월 19일) 1610년(광해군 2) 2월 홍문관을 통해 김공빈을 추숭하는 일을 본격화하던 가운데,(『광해군일기』 2년 2월 18일) 예조에서 이를 반대하며 왕후보다 하나 격이 낮은 왕비로 추존하고 별묘를 세워 제사를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광해군일기』 2년 3월 23일) 결국 광해군은 김공빈을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사당의 이름은 봉자(奉慈)라 하였으며, 능호는 성릉(成陵)이라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3월 29일)

김공빈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진 후 예조에서는 그의 3대 추증을 건의하여(『광해군일기』 2년 4월 3일),(『광해군일기』 2년 4월 20일) 아버지 김희철을 비롯한 3대에 대한 추증이 이루어졌다. 이어 그해 6월 6일에는 봉자전에 대한 추숭례가 행해졌고,(『광해군일기』 2년 5월 27일) 이듬해에는 성릉 보수공사가 논의되었다.(『광해군일기』 3년 3월 7일)

그런 가운데 광해군이 1612년(광해군 4) 명(明)나라에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하여 김공빈의 왕후 책봉을 요청하려고 하자 대신들은 이를 반대하였다.(『광해군일기』 4년 윤11월 11일) 그러나 광해군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인 1613년(광해군 5) 박홍구(朴弘耉)와 이지완(李志完)이 명나라에 파견되어 김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12월 11일) 그리고 1년 반 후인 1615년(광해군 7) 사은사(謝恩使)윤방(尹昉) 등이 책봉 고명을 받아왔으나, 관복은 받아오지 못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6월 13일) 명의 고명을 받은 후 공성왕후의 신주를 고쳐 쓰고 광해군이 제사를 직접 올렸으며,(『광해군일기』 7년 8월 27일) 9월 13일 종묘에 부묘되었다.(『광해군일기』 7년 9월 13일)

1616년(광해군 8)에는 김공빈에게 명헌(明獻)이라는 존호가 더해졌으며,(『인조실록』 10년 3월 30일) 재차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김공빈의 면복(冕服)을 청하여 이듬해인 1617년(광해군 9) 8월 면복을 받아 태묘에 고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11월 4일),(『광해군일기』 9년 8월 19일),(『광해군일기』 9년 9월 17일)

인조반정 후 추탈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광해군이 폐위되자 김공빈의 시호는 삭제되었고 신주 또한 사가로 내보내졌으며, 고명과 면복은 불태워지고 능호 역시 혁파되었다.(『인조실록』 1년 3월 18일) 또한 추승 당시 만들어졌던 석물들 또한 헐도록 명하였다.(『인조실록』 8년 5월 21일)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재 김공빈의 묘에는 석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묘소와 후손

김공빈의 무덤은 광해군 즉위 후 성릉으로 승격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능호가 폐지되어 현재는 성묘(成墓)로 불리고 있으며,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해있다. 1991년 사적 제365호로 지정되었다.

김공빈은 선조와의 사이에서 2남을 두었는데 2남이 광해군이다. 1남은 임해군이진(李珒)으로 1585년(선조 18) 허명(許銘)의 딸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혼인하였다.(『선조실록』 18년 4월 17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왕명으로 병력을 모으는 일을 하기 위해 함경도 지역으로 파견되었으나,(『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회령(會寧)과 경성(鏡城)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국세필(鞠世弼) 등에게 포박된 후 왜장 가토 기요사마[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선조실록』 25년 9월 4일), (『선조실록』 25년 9월 25일) 이후 여러 차례 협상 끝에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석방되어 한성으로 돌아왔다.(『선조실록』 26년 8월 23일) 이후 임해군은 더욱 성질이 난폭해져 노비와 전토를 약탈하였으며,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때려죽이는 등 좋지 못한 행실을 보였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임해군의 파직을 요청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4년 3월 19일),(『선조실록』 35년 7월 4일),(『선조실록』 39년 8월 23일),(『선조실록』 39년 8월 24일),(『선조실록』 39년 8월 24일),(『선조실록』 39년 8월 25일),(『선조실록』 39년 8월 25일),[『선조실록』선조 39년 8월 27일 2번째기사],(『선조실록』 39년 8월 27일)

1608년(광해군 즉위년)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이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다는 상소로 인해,(『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4일) 임해군은 결국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4일),(『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4일),(『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0일),(『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0일),(『광해군일기』 즉위년 3월 2일)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임해군은 결국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 4월 사망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4월 29일)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整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승범, 「공빈 추숭 과정과 광해군의 모후 문제」, 『민족문화연구』48, 2008.
  • 김종수, 「1610년(광해군 2) 공빈 추숭과 광해군 사친추숭도감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2004.
  • 김호, 「1616년(광해군 8) 선조 묘호 추상 및 공성왕후의 추숭과 선조묘호도감의궤」,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2004.
  •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2, 역사문화, 2002.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