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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lokwik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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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실록사전 관계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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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3-24T10:44:2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https://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htm 임진왜란의 전투들]&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1.htm 부산진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2.htm 동래성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3.htm 경주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4.htm 상주지패(尙州之敗)]&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5.htm 충주지패(忠州之敗)]&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6.htm 한강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7.htm 옥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8.htm 합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09.htm 적진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0.htm 양주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1.htm 임진지전(臨津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2.htm 여강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3.htm 사천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4.htm 당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5.htm 당항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6.htm 용인지전(龍仁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7.htm 회양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8.htm 무계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19.htm 율포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0.htm 철령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1.htm 예천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2.htm 평양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3.htm 금화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4.htm 운암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5.htm 마진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6.htm 웅치지전(熊峙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7.htm 이치지승(梨峙之勝)]&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8.htm 한산전(閑山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29.htm 제1차 진주성 대첩]&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0.htm 평양첩(平壤捷)]&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1.htm 벽제지전(碧蹄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2.htm 행주승첩(幸州勝捷)]&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3.htm 제2차 진주성 대첩]&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4.htm 칠천량 전투]&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5.htm 남원지패(南原之敗)]&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6.htm 직산지전(稷山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7.htm 울산지전(蔚山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imjinwar/imjinwar_w38.htm 노량지전(露梁之戰)]&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lo/lo_kyeonggi.htm 경기지역 외관]&lt;br /&gt;
*[http://dh.aks.ac.kr/~sillokwiki/graph/medicine/medicine.htm 약재]&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91%90%EC%88%98(%E9%A0%AD%E9%A0%88%E5%B7%BE)&amp;diff=15872</id>
		<title>두수(頭須巾)</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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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9-06T11:18: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Tutor님이 두수(頭 須+巾) 문서를 두수(頭須巾)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 &lt;br /&gt;
&lt;br /&gt;
{{의복|대표표제=두수|한글표제=두수|한자표제=頭[須+巾]|대역어=|상위어=|하위어=총(總)|동의어=결개(結介)|관련어=수파(首帊)|분야=생활·풍속/의생활/관모|유형=의복|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대한제국|왕대=|집필자=윤양노|용도=|시기=|관련의례행사=|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814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ua_12711017_001 『영조실록』 27년 11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2020_003 『영조실록』 33년 2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05025_003 『태종실록』 8년 5월 25일]}}&lt;br /&gt;
&lt;br /&gt;
상복을 입을 때 여자들의 머리를 덮는 수건.&lt;br /&gt;
&lt;br /&gt;
수&lt;br /&gt;
&lt;br /&gt;
=='''내용'''==&lt;br /&gt;
&lt;br /&gt;
두수(頭須+巾)는 상투 즉 계(髻)를 튼 후 머리카락의 밑동을 묶기 위한 길고 좁은 천 조각으로, 실과 채색 비단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총(總)이라고도 한다. 주로 24.24㎝ 길이의 세포(細布)로 하며,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가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는 포총(布總)을 하고 24.24㎝ 중 18.18㎝는 아래로 드리운다. 『예기(禮記)』 증자문에 따르면, ‘호총(縞總)’은 흰 비단으로 하며 길이는 24.24㎝이다. 조선시대 『가례의절(家禮儀節)』에 보이는 ‘효권(孝圈)’ 역시 세속의 부녀자가 상복을 입을 때 흰색 베를 가지고 계 위에서 묶는 것인데, 중국의 제도와는 달리 남은 천을 드리우지 않는다.&lt;br /&gt;
&lt;br /&gt;
1408년(태종 8) 5월에 예조에서 상제(喪制)를 정하였는데, 머리 형태는 앞서 언급한 ‘총’이나 ‘효권’이 아닌 머리에 덮는 포두수(布頭須+巾)로 하였으며, 『세종실록』 「오례의」 흉례 의식에서 포두수는 머릿수건, 즉 수파(首帕)로 대신한다고 하였다.&lt;br /&gt;
&lt;br /&gt;
1408년에 정한 바로는 생포(生布)를 쓴다고 하였으나 1751년(영조 27) 11월 [[현빈궁(賢嬪宮)]]의 [[성복(成服)]]에는 중궁전의 대공복(大功服)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과 빈궁의 소공복(小功服)에 대수·장군·흑개두·두수 및 대에 숙포(熟布)를 사용하였다. 또한 현빈궁에 속한 상궁 이하의 두수 또한 아주 가는 숙포를 쓴다고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2711017_001 『영조실록』 27년 11월 17일]). 1757년(영조 33) 2월 왕세자빈이 연제(練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된 개두·두수를 착용한다고 하였으므로 생포와 숙포의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3302020_003 『영조실록』 33년 2월 20일]). 다만 그 색에 있어서 연제에는 백개두와 백두수로 하고 상제와 담제에는 흑개두와 흑두수를 하였다.&lt;br /&gt;
&lt;br /&gt;
=='''용례'''==&lt;br /&gt;
&lt;br /&gt;
蓋頭(布帽羅火笠) 布頭[須+巾] 大袖(長衫)([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05025_003 『태종실록』 8년 5월 25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가례의절(家禮儀節)』      &lt;br /&gt;
&lt;br /&gt;
[[분류:생활·풍속]][[분류:의생활]][[분류:관모]][[분류:의복]][[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대한제국]]&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91%90%EC%88%98(%E9%A0%AD_%E9%A0%88%2B%E5%B7%BE)&amp;diff=15873</id>
		<title>두수(頭 須+巾)</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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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9-06T11:18:46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Tutor님이 두수(頭 須+巾) 문서를 두수(頭須巾) 문서로 이동했습니다&lt;/p&gt;
&lt;hr /&gt;
&lt;div&gt;#넘겨주기 [[두수(頭須巾)]]&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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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궤(犒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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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9-05T06:15:3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Tutor님이 호궤(牛高 饋) 문서를 호궤(犒饋)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한자표기 수정&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의식행사|대표표제=호궤|한글표제=호궤|한자표제=牛高 饋|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행행(行幸), 군영(軍營), 호위군(護衛軍)|분야=정치/군사·국방|정치/군사·국방/편제|왕실/왕실의례|유형=의식·행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조선|집필자=노영구|시작시기=|시행시기=|시행기관=|시행장소=|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711|실록연계=}}&lt;br /&gt;
&lt;br /&gt;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사들이나 화성(華城) 축조와 같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관원, 일군 등에게 술과 음식을 주어 이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것.&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호궤는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호위하는 군사들이나 주요한 일을 담당하는 관원과 일군 등에게 술과 음식을 주어 이들을 위로하는 행사이다. 이 행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며 조선후기 국왕이 교외로 거둥할 때 주정소(晝停所: 한자 추가)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거나 귀환한 이후 궁궐 주변에서 이들에게 음식을 지급하여 위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는 그 음식 비용을 호조에서 담당하였으나 17세기 이후에는 각 군영에서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래는 술과 음식으로 호궤하였는데 1778년(정조 2) 임금이 군사들의 진법 훈련인 [[열무(閱武)]]에 참여한 뒤 [[모화관(慕華館)]]에서 음식을 먹인 이후에는 군사들에게 대금으로 나누어 주도록 병조에서 규례를 제정하였다. 그 비용은 장졸 1인당 2전 7푼씩이었다.&lt;br /&gt;
&lt;br /&gt;
=='''연원 및 변천'''==&lt;br /&gt;
&lt;br /&gt;
호궤하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개국 직후인 1397년(태조 6) 5월에 호궤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교외로 거둥할 때 수행하는 주요 군영의 군병을 호궤하는 경우 그 음식 비용은 최초에는 호조에서 지급하였다. 그 비용은 장졸 1인당 2전 7푼씩이었다. 이전에는 대체로 임금이 거둥할 때에 낮에 머무르는 주정소에서 음식을 주었으나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예를 들어 훈련도감의 경우 1677년(숙종 3) 임금이 [[숭릉(崇陵)]]을 참배하고 귀환한 뒤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급여했고 1759년(영조 35)에 임금이 직접 [[돈화문(敦化門)]]에 나와서 음식을 급여했는데, 이듬해부터는 계속 대금으로 그 비용을 지급하였다. 연초에 임금이 음식을 내려 줄 때 사용하는 전포(展布)는 훈련도감에서 준비하였다. 어영청의 경우도 비슷한데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장관(將官) 이하의 군병에게는 최초 호조에서 지급하였는데 1684년(숙종 10) 이후부터는 어영청에서 그 경비를 부담하였다. 호궤는 대개 음식으로 하였는데, 1778년(정조 2) 임금이 군사들의 진법 훈련인 열무에 참여한 뒤 모화관에서 음식을 내린 이후에는 대금으로 나누어 주도록 병조에서 규례를 제정하였다.&lt;br /&gt;
&lt;br /&gt;
=='''절차 및 내용'''==&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호궤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해서는 현재 규장각에 보관 중인 자료로서 총융청(摠戎廳) 소속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호궤 행사의 의식 절차를 정리한 홀기(笏記)인 『호궤의주(犒饋儀注)』 등에 그 내용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호궤하기 전날 [[전설사(典設司)]]에서 세마평(洗馬坪) 단상(壇上)에 임금이 머무는 막사인 어막(御幕)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행사 당일 [[대가(大駕)]]가 군문인 원문(轅門) 밖에 도착하면 [[선전관(宣傳官)]]이 무릎을 꿇고 징을 두 차례 울리고 대취타 할 것을 아뢴다. 이어서 원문을 열고 대가가 장대에 도달하여 올라가 앉게 된다. 이후 음악이 연주되고 이어 군사들을 먹이고, 진법을 행하고 이어서 임금이 환궁하는 절차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음악의 연주는 호궤하기 전에는 [[무환지악(武桓之樂)]]과 징각지악(徵角之樂)을 연주하고, 호궤한 이후에는 군악(軍樂), 여민악(與民樂), 그리고 영산회상(靈山會象)을 사용하였다.&lt;br /&gt;
&lt;br /&gt;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lt;br /&gt;
&lt;br /&gt;
조선후기 호궤 행사의 규모는 매우 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95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행차하여 한성으로 돌아온 지 5일이 지난 윤2월 21일 창덕궁[[춘당대(春塘臺)]]에서 어가를 따라갔다 온 신하와 장교 및 군졸에 대한 호궤가 벌어졌는데, 이날 정조는 융복을 입고 말을 타고 춘당대에 도착하여 전교를 내려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마음껏 마실 것을 명하였다.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3,846명에 달하였는데, 이들에게는 각각 흰 떡 3개, 대구어 1편, 황육자(黃肉炙) 1곶, 그리고 술 한 그릇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이 밖에 건호궤(乾犒饋)라 하여 정리소(整理所), 장용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의 대장 이하 장교 및 군병 3,536명에게 일률적으로 돈 2전 7푼이 지급되었다. 이 비용은 정리소에서 지급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lt;br /&gt;
*『호궤의주(犒饋儀註)』      &lt;br /&gt;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lt;br /&gt;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1998.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9711&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정치]][[분류:군사·국방]][[분류:편제]][[분류:왕실]][[분류:왕실의례]][[분류:의식·행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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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궤(牛高 饋)</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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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lt;div&gt;#넘겨주기 [[호궤(犒饋)]]&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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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운산금광회사(雲山金鑛會社)</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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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2-03-09T09:39:2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집단기구|대표표제=운산금광회사|한글표제=운산금광회사|한자표제=雲山金鑛會社|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광산(鑛山), 채굴권(採掘權),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東洋鑛業開發株式會社)|분야=경제/산업/광업|유형=집단·기구|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후기, 대한제국기|왕대=조선후기, 대한제국기|집필자=조재곤|설치시기=1895년(고종 32)|폐지시기=1939년|소속관서=탁지부(度支部)|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3329|실록연계=}}&lt;br /&gt;
&lt;br /&gt;
1895년(고종 32) 미국이 조선 정부로부터 평안도 운산지역의 금광채굴권을 양도받은 뒤 채굴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미국은 1895년 제국열강 중 처음으로 조선에서 광산이권 획득에 성공한 후 회사를 설립하였고, 1939년 일본에게 넘길 때까지 약 40년 동안 채굴하였다.&lt;br /&gt;
&lt;br /&gt;
=='''설립 경위 및 목적'''==&lt;br /&gt;
&lt;br /&gt;
미국은 조선 금광의 유망성에 주목하여 한미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토대로 세밀한 기술적인 탐사를 거쳐 매장량이 가장 풍부한 운산금광을 개발하기로 하였다. 미국이 운산금광 채굴계약을 정식으로 조선 정부와 체결한 것은 1895년 7월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이 미국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이미 10년 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이었다.&lt;br /&gt;
&lt;br /&gt;
1887년(고종 24) 앨런은 금광이권을 미국 상사에게 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며 함유량이 가장 많기로 소문나 있는 평안도 운산금광의 독점권을 줄 것을 조선 정부에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가 조선에서 떠나게 됨에 따라 교섭은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던 중 앨런이 1890년(고종 27) 7월부터 주한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1892년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앨런은 조선 정부에게 미국인에게 금광이권을 주라고 다시 권유하였고 그 결과 운산금광을 모스에게 준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계약체결 시 모스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앨런이 대신 계약서를 작성하고 7월 2일 궁내부 대신김한종의 서명을 받아 7월 15일 탁지부 대신이하영과 전 20조의 계약을 체결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의하면 조선개광회사는 주식회사로 모스와 조선 왕실이 공동 경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모스는 계약체결 후에도 요코하마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됨에 따라 실질적인 교섭은 앨런과 미국무역회사 제물포지점장 타운젠드(William Townsend)가 맡았다. 타운젠드와 동행한 광산기사 에버런트(Everant)는 1개월 체류하면서 기계들을 수선하고 개광 착수에 앞서 실태를 세밀히 파악하였다.&lt;br /&gt;
&lt;br /&gt;
그러나 특허권은 당분간 실행되지 못했고 왕후 시해 등 돌발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일단 정지되었다. 그러던 중 1896년 4월 14일 앨런 등의 요청에 따라 4월 17일 궁내부 대신이재순이 금광 약정 기일의 재인가를 조인하였고, 5월 서명된 계약안은 외무대신이완용에게 공식으로 수교되었다. 그 내용은 1895년 7월의 계약안에 단지 기간 만 1896년부터 25년으로 개정하고 앞으로 6개월 이내에 광산개발에 착수한다는 조건이었다.&lt;br /&gt;
&lt;br /&gt;
=='''조직 및 역할'''==&lt;br /&gt;
&lt;br /&gt;
1896년 4월 모스는 정식으로 운산금광 채굴권을 얻고, 5월 10여 명의 인원을 운산에 파견하여 채광업무를 개시하였다. 8월 31일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서 매주당 액면가 50달러에 해당하는 1998주를 모집하여 자본금 10만 달러로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and Development Co.)를 설립하여 인가를 얻었다. 그런데 자본이 부족했던 모스는 이 이권을 헨리 콜브랜(Henry Collbran)에게 양도할 생각이 있었다. 이를 간파한 헌트(Leigh S. J. Hunt)는 1897년 요코하마로 모스를 찾아가 적당한 가격으로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고, 모스가 이를 받아들여 3만 달러에 넘겼다고 한다. 이권을 양도받은 헌트와 파세트(J. Sloat Fasset)은 1897년 9월 29일 영국자본까지 수용하여 버지니아에서 총 자본금 500만 달러를 모아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조직하여 웨스트 버지니아 주 정부의 인가를 얻었다. 이들이 조선개광회사를 완전히 인수한 것은 1898년 5월 18일이었다. 이 회사는 뉴욕에 본사를 두고 제물포와 운산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헌트는 한국왕실과 공동소유가 아닌 미국인 단독으로 경영하려 하였고, 결국 1899년 3월 27일 궁내부 광무감독이용익과 금광회사 대변인 파세트가 수정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이후부터는 운산금광은 동양광업개발회사 단독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이후 동양광업개발회사는 1900년 1월 1일부터 매년 2,500원을 상납한다는 조약의 이행으로 우선 조선 왕실에 정식으로 5,000원을 지불하였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운산금광은 ‘노다지’라는 유행어가 돌 만큼 동양 최대의 수익성 높은 금광이었다. 1903년 5월 처음 이익 배분이 있었으며, 1939년 일본인에게 회사를 넘겨줄 1938년까지 42년간 지속되었다. &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윤성순, 『조선광업지』, 대한중석광업회사, 1952.      &lt;br /&gt;
*이배용, 「구한말 미국의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에 대하여」, 『역사학보』50·5, 1971.      &lt;br /&gt;
*평안북도지,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lt;br /&gt;
&lt;br /&gt;
[[분류:경제]][[분류:산업]][[분류:광업]][[분류:집단·기구]][[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후기, 대한제국기]][[분류:조선후기, 대한제국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98%81%EB%A6%89(%E5%AF%A7%E9%99%B5)&amp;diff=15865</id>
		<title>영릉(寧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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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10-11T14:36:0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세종릉으로 착오&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능원묘|대표표제=영릉|한글표제=영릉|한자표제=寧陵|대역어=|상위어=능원(陵園)|하위어=|동의어=|관련어=석실(石室), 인선왕후(仁宣王后), 수릉(壽陵), 합장릉(合葬陵)|분야=왕실/왕실건축/능·원·묘|유형=능·원·묘|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집필자=이혜원|조성시기=1659년(효종 10)|장소=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좌향=건좌손향(乾坐巽向)|묻힌사람=효종|천장시기=1673(현종 14)|천장장소=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천장좌향=자좌오향(子坐午向)|천장후묻힌사람=효종,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762|실록연계=}}&lt;br /&gt;
&lt;br /&gt;
조선 효종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능.&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다. 8세 되던 해인 1626년(인조 4)에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으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그 뒤 소현세자가 귀국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10년 만인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10월 29일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의 영릉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만인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동쪽으로 천장하였다.&lt;br /&gt;
&lt;br /&gt;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이다. 1631년(인조 9)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으며, 1649년(효종 즉위)에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효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천장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74년(현종 15) 2월 24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4일, 유언에 따라 효종의 능침 아래쪽에 안장되었다[『현종실록』 15년 6월 4일].&lt;br /&gt;
&lt;br /&gt;
=='''조성 경위'''==&lt;br /&gt;
&lt;br /&gt;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을 국상을 주관하는 총호사(摠護使)로 임명하였다. 장지로는 세종의 영릉이 있는 여주의 홍제동(弘濟洞), 건원릉 경내의 첫 번째 언덕, 수원 등이 후보에 올랐다. 두루 살핀 끝에 수원으로 결정하고 산릉 조성 공사를 시작했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건원릉 주변을 다시 살펴볼 것을 제안하였다. 여주는 멀고, 수원은 군사 요충지이므로 능을 두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송시열의 주장이 있은 이후 수원에 능을 조성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자, 현종은 할 수 없이 건원릉 안 건좌(乾坐)의 언덕을 산릉지(山陵址)로 삼도록 하였다[『현종실록』 즉위년 6월 3일][『현종실록』 즉위 7월 11일 5번째기사]. 정자각과 재실의 규모는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의 제도를 따르도록 하였고, 석물은 건원릉을 참고하였다. 수원부에서 이미 만들기 시작한 석물은 승군을 투입해 운반했으며, 그해 10월 29일에 공사를 마쳤다.&lt;br /&gt;
&lt;br /&gt;
그런데 영릉은 조성 이후 매년 수리를 해도 계속 병풍석의 틈이 벌어지고, 물이 고였다. 이에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가 능을 봉심한 뒤 상소를 올려, 능침을 개봉(改封)하거나 천릉할 것을 제안하였다. 결국 1673년(현종 14) 5월 5일에 천장을 결정하고, 10월 7일 여주 홍제동에 자리한 세종의 영릉 동쪽으로 천장하였다. 총호사는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맡았다. 이때 새 영릉의 석물은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되, 세종의 능과 같은 산 안에 있으므로 영릉(英陵)의 석물을 참고하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4년 6월 12일][『현종실록』 14년 6월 20일].&lt;br /&gt;
&lt;br /&gt;
=='''조성 상황'''==&lt;br /&gt;
&lt;br /&gt;
처음에는 병풍석을 둘렀으나, 여주로 천장한 뒤에는 난간석만 설치하였다. 상설(象設) 제도는 3계로 나누어, 상계에는 곡장 안에 망주석 2개, 혼유석 1개, 호석(虎石)과 양석(羊石) 4개를 배치하였다. 중계에는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 장명등 1개를, 하계에는 무인석 1쌍과 마석 2개를 배치하였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은 세조의 광릉에서 비롯되었다.&lt;br /&gt;
이후 성종의 능인 선릉(宣陵)을 조성할 때부터 다시 설치하기 시작했으나, 영릉을 천장하면서 다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인선왕후의 능에는 곡장만 없을 뿐, 다른 의물의 배치는 효종의 능과 똑같다. 능원 아래에는 정자각·비각·홍살문·재실이 있고,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는 금천(禁川)이 흐른다. 영릉에는 왕과 왕비의 능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 길게 뻗어 내린 언덕의 위, 아래에 각각 생기가 왕성한 정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릉은 이와 같이 위아래 형태로 조성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산릉 터를 건원릉 안 옛 영릉의 남서쪽으로 정하였다. 이는 영릉에 사용했던 석물을 다시 이용하도록 하여, 산릉 공역에 따른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려는 의도에서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lt;br /&gt;
&lt;br /&gt;
1703년(숙종 29)에는 영릉의 정자각을 중건하면서 비각을 새로 건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의 영릉을 조성할 때부터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표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효종의 능을 천릉하면서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때는 표석만 설치하고 비각은 세우지 않았다가 나중에 건립한 것이다.&lt;br /&gt;
&lt;br /&gt;
=='''관련 사항'''==&lt;br /&gt;
&lt;br /&gt;
천장한 뒤 비어 있던 옛 영릉 자리에는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맨 처음 영릉의 제일 후보지로 낙점되었던 수원의 산릉지에는 정조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이 조성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lt;br /&gt;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lt;br /&gt;
*『[효종영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lt;br /&gt;
*『[효종영릉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奉]山陵都監儀軌)』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9762&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왕실]][[분류:왕실건축]][[분류:능·원·묘]][[분류:능·원·묘]][[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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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억년(朴億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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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박억년|한글표제=박억년|한자표제=朴億年|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연산군|집필자=박은화|자= 기옹(耆翁) |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성|출생=1455년(세조 1)|사망=1496년(연산군 2년) 7월|본관=반남(潘南)|주거지= 김포(金浦) |묘소소재지= 경기도 김포현(金浦縣) 두모곡(豆毛谷)|증조부= 박규(朴葵) |조부= 박병문(朴秉文) |부= 박림종(朴林宗) |모_외조=양천허씨(陽川許氏): 허손(許蓀)의 딸|형제=(동생)박조년(朴兆年)|처_장인=경주이씨(慶州李氏): 이만손(李蔓孫)의 딸 →(자녀)3남 2녀|자녀=(1자)박진(朴縉) (3자)박굉(朴紘) (1녀)홍윤조(洪胤祖)의 처 (2녀)여세윤(呂世胤)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579|실록연계=}}&lt;br /&gt;
&lt;br /&gt;
[1455년(세조 1)~1496년(연산군 2)]. 성종~연산군 때 예조 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문신.&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문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성종~연산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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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박영신|한글표제=박영신|한자표제=朴榮臣|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무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인조|집필자=박은화|자= 인보(仁輔) |호=|봉작=|시호= 충장(忠莊) |출신=양반|성별=남성|출생=1578년(선조 11) 12월 3일|사망=1624년(인조 2) 2월 6일|본관=밀양(密陽)|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양주(楊州) 마산동(馬山洞)|증조부=|조부= 박호(朴虎) |부= 박종남(朴宗男) |모_외조=이씨(李氏): 이세준(李世俊)의 딸|형제=|처_장인=이씨(李氏):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의 딸|자녀=(1자)박지병(朴之屛) (2자)박지원(朴之垣) (3자)박지번(朴之蕃) (4자)박지용(朴之墉) (1녀)이문주(李文柱)의 처 (서자)박지곤(朴之閫)|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583|실록연계=}}&lt;br /&gt;
&lt;br /&gt;
[1578년(선조 11)~1624년(인조 2)]. 선조~인조 때의 무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금천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무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인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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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영(朴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B%B0%95%EC%98%81(%E6%9C%B4%E8%8B%B1)&amp;diff=1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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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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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박영|한글표제=박영|한자표제=朴英|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무신, 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성종~중종|집필자=박은화|자= 자실(子實) |호= 송당(松堂) |봉작=|시호= 문목(文穆) |출신=양반|성별=남성|출생=1471년(성종 2)|사망=1540년(중종 35) 3월 29일|본관=밀양(密陽)|주거지= 선산(善山) |묘소소재지= 경상도 선산(善山) 관동(官洞) |증조부= 박호문(朴好問) |조부= 박철손(朴哲孫) |부= 박수종(朴壽宗) |모_외조=전주이씨(全州李氏):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딸|형제=|처_장인=광주이씨(廣州李氏): 이세광(李世匡)의 딸|자녀=(1자)박거이(朴居易) (1녀)김창봉(金昌鳳)의 처 (2녀)남수정(南守正)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송당집(松堂集)』,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581|실록연계=}}&lt;br /&gt;
&lt;br /&gt;
[1471년(성종 2)~1540년(중종 35)]. 중종 때의 무신. 『중종실록』(중종 35년 3월조)에 보이는 그의 전기(傳記) 중에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의 저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lt;br /&gt;
&lt;br /&gt;
[[분류:정치·행정가]][[분류:관료]][[분류:무신]][[분류:인물]][[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성종~중종]]&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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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라피에르(拉別耳)</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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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물|대표표제=라피에르|한글표제=라피에르|한자표제=拉別耳|대역어=라피에르(La Pierre, Lapierre)|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기해사옥(己亥邪獄), 병오사옥(丙午邪獄), 세실 제독([瑟西耳] 提督)|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프랑스/중국/대한민국|시대=청/조선|왕대=청/조선|집필자=한승훈|이칭=|성별=남자|생년=|몰년=|본관=|출신지=프랑스|관력=프랑스 해군 대령,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가족관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912|실록연계=}}&lt;br /&gt;
&lt;br /&gt;
&amp;quot;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amp;quot; (인용 출처: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tionary.asp?name1=%B6%F3%C7%C7%BF%A1%B8%A3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프랑스/중국/대한민국]][[분류:청/조선]][[분류:청/조선]]&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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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물|대표표제=라피에르|한글표제=라피에르|한자표제=拉別耳|대역어=라피에르(La Pierre, Lapierre)|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기해사옥(己亥邪獄), 병오사옥(丙午邪獄), 세실 제독([瑟西耳] 提督)|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프랑스/중국/대한민국|시대=청/조선|왕대=청/조선|집필자=한승훈|이칭=|성별=남자|생년=|몰년=|본관=|출신지=프랑스|관력=프랑스 해군 대령,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가족관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912|실록연계=}}&lt;br /&gt;
&lt;br /&gt;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용 출처: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tionary.asp?name1=%B6%F3%C7%C7%BF%A1%B8%A3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프랑스/중국/대한민국]][[분류:청/조선]][[분류:청/조선]]&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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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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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La Pierre 또는 Lapierre(?~?).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分艦隊長), 해군대령. 중국명 납별이(拉別耳). 프랑스에서 출생. 1846년 세실(Cecile) 제독이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를 포함한 3명의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해 조선정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후, 이에 대한 회신을 받고자 1847년 7월 2척의 군함에 메스트로(Maistre, 李)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부제를 태우고 중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조선 근해에 이르러 전라도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좌초되어 조선정부의 회답을 받지 못하고 종교의 자유를 청하는 서한을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한 후 구조하러 온 영국(英國)배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조선정부는 그 후 세실의 편지에 회신을 보냈는데 이 회신은 마카오에 있는 라피에르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인용 출처: [http://dictionary.catholic.or.kr/dictionary.asp?name1=%B6%F3%C7%C7%BF%A1%B8%A3&lt;br /&gt;
'라피에르', 『가톨릭 사전』 http://dictionary.catholic.or.kr])&lt;br /&gt;
&lt;br /&gt;
=='''참고문헌'''==&lt;br /&gt;
&lt;br /&gt;
* 『敎會史硏究,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프랑스/중국/대한민국]][[분류:청/조선]][[분류:청/조선]]&lt;/div&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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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경용(南景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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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남경용|한글표제=남경용|한자표제=南景容|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영조|집필자=이기순|자= 백근(伯謹) |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704년(숙종 30)|사망=1762년(영조 38)|본관=의령(宜寧)|주거지= 강원도 춘천(春川)|묘소소재지= 강원도 춘천(春川)|증조부= 남두(南紏) |조부= 남상린(南祥麟) |부= 남격(南格); 진사(進士)|모_외조=윤씨(尹氏); 윤흥돈(尹興敦)의 딸|형제=(동생) 남상용(南尙容); 진사(進士) (동생) 남우용(南友容)|처_장인=김씨(金氏); 김준갑(金俊甲)의 딸|자녀=(1자) 남급(南圾)|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677|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704년(숙종 30)∼1762년(영조 38) = 59세.]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문신. 자(字)는 백근(伯謹)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남격(南格)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윤흥돈(尹興敦)의 딸이다. 우암(寓庵) 송시열(宋時烈)⋅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이다. [『동춘당집(同春堂集)』 속집 권12 부록]&lt;br /&gt;
&lt;br /&gt;
=='''영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741년(영조 17)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amp;lt;사마방목&amp;gt;]&lt;br /&gt;
&lt;br /&gt;
1753년(영조 29)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1755년(영조 31) 종묘 부봉사(副奉事)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762년(영조 38) 남인의 재상 조재호(趙載浩)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노론(老論)에 의하여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당하여 사사(賜死)되었는데, 조재호를 지지하던 남경용이 엄홍복(嚴弘福)⋅유채(柳綵)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보호하고 노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백성들을 미혹시켰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다.&lt;br /&gt;
&lt;br /&gt;
1790년(정조 14) 손자 남백승(南百昇)이 정조에게 조부 남경용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여 마침내 신원(伸寃)되었다.[『정조실록』 14년 2월 14일 1번째기사]&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강원도 춘천(春川)에 있다.&lt;br /&gt;
&lt;br /&gt;
부인 김씨(金氏)는 김준갑(金俊甲)의 딸인데, 아들은 남급(南圾)이고, 손자는 남백응(南百膺)⋅남백승(南百昇)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영조실록(英祖實錄)』            &lt;br /&gt;
*        『정조실록(正祖實錄)』            &lt;br /&gt;
*        『사마방목(司馬榜目)』            &lt;br /&gt;
*        『동춘당집(同春堂集)』            &lt;br /&gt;
*        『손재집(損齋集)』            &lt;br /&gt;
*        『태을암집(太乙菴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영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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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곽간(郭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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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40:50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곽간|한글표제=곽간|한자표제=郭趕|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명종~선조|집필자=이현숙|자= 윤정(允靜) |호= 매당(梅塘), 죽재(竹齋)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29년(중종 24)|사망=1593년(선조 26)|본관=현풍(玄風)|주거지= 현풍 솔례리(率禮里: 솔례촌) |묘소소재지=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구지봉(仇知峰) |증조부= 곽승화(郭承華); 진사(進士),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조부= 곽위(郭瑋); 현감(縣監)|부=곽지견(郭之堅); 의정부 사인(舍人)|모_외조=상산김씨(商山金氏); 부사(府使) 김수돈(金守敦)의 딸|형제=|처_장인=박씨(朴氏); 사헌부 감찰(監察) 박순(朴純)의 딸→(자녀) 2남 1녀|자녀=(1자) 곽재용(郭再容); 장사랑(將仕朗) (2자) 곽재정(郭再定); 참의(參議)에 증직 (1녀) 승지(承旨) 이언영(李彦英)의 처 (서자) 곽순생(郭舜生) (서녀)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의 첩|유명자손=|저술문집=죽재문집(竹齋文集)|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632|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29년(중종 24)∼1593년(선조 26) = 6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 사성(司成)⋅강릉부사(江陵府使)이다. 자(字)는 윤정(允靜)이고, 호(號)는 매당(梅塘), 또는 죽재(竹齋)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현풍 솔례리(率禮里: 솔례촌) 사람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사인(舍人)곽지견(郭之堅)이고, 어머니 상산김씨(商山金氏)는 부사(府使)김수돈(金守敦)의 딸이다. 성균관 사성(司成)곽지번(郭之藩: 곽재우의 조부)의 조카이고, &amp;lt;정유재란&amp;gt;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안음현감(安陰縣監)곽준(郭䞭)의 4촌 형이다. 현풍곽씨 중에서 행실을 닦아 이름이 난 곽간(郭趕)⋅곽월(郭越: 곽재우의 아버지)⋅곽준(郭䞭) 등 8명의 종형제, 이른바 ‘현풍 팔주(玄風八走)’의 맏형이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66]&lt;br /&gt;
&lt;br /&gt;
=='''명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46년(명종 1)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18세였다.[&amp;lt;문과방목&amp;gt;] 바로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묘지명]&lt;br /&gt;
&lt;br /&gt;
1550년(명종 5) 형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고, 1552년(명종 7)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가서, 명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은자(銀子: 은화)를 수색하는 수은어사(搜銀御史)를 겸임하였다. 당시 사신 일행의 역관(譯官)과 종자(從者)들은 은화를 가지고 중국에 가서 중국 물화를 밀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매에 나섰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금지하였다. 마침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권신(權臣) 심통원(沈通源)의 짐바리가 너무 많은 것을 본 곽간은 짐을 철저히 조사한 후, 밀매한 중국 물화를 압수하여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이 사실이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되자, 심통원은 파직 당하였다.[『명종실록』 11년 11월 2일 1번째기사] 그러나 심통원의 보복을 두려워한 곽간은 거짓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서울을 떠나서 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10여 년 동안 은거하였다.&lt;br /&gt;
&lt;br /&gt;
1566년(명종 21) 다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를 믿고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少尹) 일파에 의하여 파직되었다.[묘지명]&lt;br /&gt;
&lt;br /&gt;
=='''선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67년(선조 즉위) 2월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파(士林派)가 득세하자, 공조⋅예조의 좌랑(佐郎)을 거쳐, 정랑(正郎)이 되었다. 내직(內職)으로는 통례원 좌통례(左通禮), 성균관 사성(司成), 장악원 판사(判事), 사제감⋅종부시 정(正) 등을 역임하였는데, 항상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외직(外職)으로는 청풍(淸風)⋅금산(金山) 현감(縣監), 정선(旌善)⋅흥해(興海)⋅영천(永川) 군수(郡守), 공주목사(公州牧使),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칭송하였다.[묘지명]&lt;br /&gt;
&lt;br /&gt;
1592년(선조 25) &amp;lt;임진왜란&amp;gt;이 일어나자, 곽간은 그 다음해에 친구 서사원(徐思遠)과 함께 현풍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도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을 찾아가 관군과 힘을 합쳐서 왜군과 싸웠다. 경상도 초유사김성일이 전염병에 걸려서 막사(幕舍)에서 갑자기 돌아가자, 의병과 관군의 연합 전선이 와해되면서, 결국 친구 서사원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고향 현풍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1593년(선조 26) 7월 23일 죽었는데, 향년이 65세였다. 문집으로 『죽재문집(竹齋文集)』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기질이 호방(豪放)하고 기량이 컸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lt;br /&gt;
&lt;br /&gt;
명종 때 벼슬길에 다시 나갔으나, 문정왕후가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다가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하여 파직당하자, 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때 낙동강 가에 ‘창주정(滄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詩)를 지으며 즐겼는데, 이때 대다수 원고가 임진왜란의 병란(兵亂)을 겪으면서 불에 타 없어졌다. 그가 죽은 뒤에 그 후손들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은 약간의 시문(詩文)을 모아 『죽재문집(竹齋文集)』을 간행하였는데, 그가 남긴 시문(詩文)에서 그의 호방한 기상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엿보인다.[묘지명] 당시 곽간이 가깝게 교유(交遊)한 사람들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한강(寒岡) 정구(鄭逑),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등인데, 도의(道義)로써 교유하며, 때때로 서로 만나 밤새도록 성리학의 심오한 이론을 토론하는 한편, 어려운 시국을 걱정하였다. 이들은 모두 영남학파로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들이었다. 선조 때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될 때 영남학파는 동인이 되고, 기호학파는 서인이 되었다. 그 뒤에 4색 당파로 나뉘어 당쟁(黨爭)을 벌이면서,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는데, 조식의 제자들은 대다수 북인이 되었다. 1590년(선조 23) &amp;lt;정여립(鄭汝立)의 옥사&amp;gt; 때, 서인의 영수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최영경을 체포하여, 정여립의 패거리로 몰아서 곤장을 때려 죽였는데, 최영경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결백을 주장하였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경상도 현풍현(玄風縣) 구지봉(仇知峰)에 있는데, 부인 박씨(朴氏)와 합장되었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그 무덤에 묻었다.[『만구집(晩求集)』 권13]&lt;br /&gt;
&lt;br /&gt;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사헌부 &amp;gt;감찰(監察)박순(朴純)의 딸인데,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amp;lt;방목&amp;gt;] 장남 곽재용(郭再容)은 장사랑(將仕朗)를 지냈고, 차남 곽재정(郭再定)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으며, 장녀는 승지이언영(李彦英)의 처가 되었다. 서자는 곽순생(郭舜生)이고, 서녀는 학유(學諭)박사제(朴思齊)의 첩이 되었다.[묘지명]&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명종실록(明宗實錄)』            &lt;br /&gt;
*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        『고대일록(孤臺日錄)』            &lt;br /&gt;
*        『대암집(大菴集)』            &lt;br /&gt;
*        『동주집(東州集)』            &lt;br /&gt;
*        『두와집(蠹窩集)』            &lt;br /&gt;
*        『만구집(晩求集)』            &lt;br /&gt;
*        『면우집(俛宇集)』            &lt;br /&gt;
*        『서애집(西厓集)』            &lt;br /&gt;
*        『성호전집(星湖全集)』            &lt;br /&gt;
*        『소재집(穌齋集』            &lt;br /&gt;
*        『완정집(浣亭集)』            &lt;br /&gt;
*        『용주유고(龍洲遺稿)』            &lt;br /&gt;
*        『죽재문집(竹齋文集)』            &lt;br /&gt;
*        『지봉유설(芝峯類說)』            &lt;br /&gt;
*        『후조당집(後彫堂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명종~선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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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남경용(南景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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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39:0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남경용|한글표제=남경용|한자표제=南景容|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영조|집필자=이기순|자= 백근(伯謹) |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704년(숙종 30)|사망=1762년(영조 38)|본관=의령(宜寧)|주거지= 강원도 춘천(春川)|묘소소재지= 강원도 춘천(春川)|증조부= 남두(南紏) |조부= 남상린(南祥麟) |부= 남격(南格); 진사(進士)|모_외조=윤씨(尹氏); 윤흥돈(尹興敦)의 딸|형제=(동생) 남상용(南尙容); 진사(進士) (동생) 남우용(南友容)|처_장인=김씨(金氏); 김준갑(金俊甲)의 딸|자녀=(1자) 남급(南圾)|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677|실록연계=}}&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704년(숙종 30)∼1762년(영조 38) = 59세.] 조선 후기 영조 때의 문신. 자(字)는 백근(伯謹)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남격(南格)이고, 어머니 윤씨(尹氏)는 윤흥돈(尹興敦)의 딸이다. 우암(寓庵) 송시열(宋時烈)⋅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이다.『동춘당집(同春堂集)』 속집 권12 부록&lt;br /&gt;
&lt;br /&gt;
=='''영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741년(영조 17)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amp;lt;사마방목&amp;gt;]&lt;br /&gt;
&lt;br /&gt;
1753년(영조 29)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1755년(영조 31) 종묘 부봉사(副奉事)가 되었다.&lt;br /&gt;
&lt;br /&gt;
1762년(영조 38) 남인의 재상 조재호(趙載浩)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노론(老論)에 의하여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유배당하여 사사(賜死)되었는데, 조재호를 지지하던 남경용이 엄홍복(嚴弘福)⋅유채(柳綵) 등과 함께 사도세자를 보호하고 노론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다가, 백성들을 미혹시켰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다.&lt;br /&gt;
&lt;br /&gt;
1790년(정조 14) 손자 남백승(南百昇)이 정조에게 조부 남경용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여 마침내 신원(伸寃)되었다.[『정조실록』 14년 2월 14일 1번째기사]&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강원도 춘천(春川)에 있다.&lt;br /&gt;
&lt;br /&gt;
부인 김씨(金氏)는 김준갑(金俊甲)의 딸인데, 아들은 남급(南圾)이고, 손자는 남백응(南百膺)⋅남백승(南百昇)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        『영조실록(英祖實錄)』            &lt;br /&gt;
*        『정조실록(正祖實錄)』            &lt;br /&gt;
*        『사마방목(司馬榜目)』            &lt;br /&gt;
*        『동춘당집(同春堂集)』            &lt;br /&gt;
*        『손재집(損齋集)』            &lt;br /&gt;
*        『태을암집(太乙菴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영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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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대덕(金大德)</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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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1:5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대덕|한글표제=김대덕|한자표제=金大德|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인조|집필자=최양규|자=득지(得之)|호=소봉(蘇峯), 이안당(易安堂)|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77년(선조 10)|사망=1639년(인조 17) 4월|본관=광산(光山)|주거지=서울, 경기도 금천(衿川)|묘소소재지=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자경 마을|증조부=김숙문(金叔文)|조부=김종(金綜)|부=(양부)김원상(金元祥) (생부)김원록(金元祿)|모_외조=(양모)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헌(李𤟜)의 딸 (생외)원주 원씨(原州元氏) : 원국량(元國良)의 딸|형제=(형)김대성(金大成) (동생)김대기(金大器)|처_장인=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대업(成大業)의 딸 →(자녀)2남 1녀|자녀=(1자)김익견(金益堅) (2자)김익중(金益重) (1녀)홍수하(洪受河)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22|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4011_001 『선조실록』 35년 4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21_001 『선조실록』 36년 3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06022_005 『선조실록』 37년 6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21_001 『선조실록』 36년 3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8010_001 『선조실록』 36년 8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09022_002 『선조실록』 37년 9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4025_007 『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7013_005 『광해군일기』 즉위년 7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03004_006 『광해군일기』 2년 3월 4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03013_001 『광해군일기』 2년 3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12001_004 『광해군일기』 2년 12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003012_008 『인조실록』 10년 3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9006_001 『인조실록』 14년 9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3_010 『인조실록』 15년 1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08029_003 『인조실록』 16년 8월 29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77년(선조 10)∼1639년(인조 17) = 6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득지(得之)고, 호는 소봉(蘇峯) 또는 이안당(易安堂)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도 금천(衿川)이다. 친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김원록(金元祿)이고, 친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원국량(元國良)의 딸이다. 어려서 백부(伯父)의 양자가 되었는데, 양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김원상(金元祥)이며, 양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헌(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김종(金綜)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김숙문(金叔文)이다. 공조 [[판서(判書)]]김예몽(金禮蒙)의 5세손이자, 기묘명현(己卯名賢) 김구(金絿)의 종손(從孫)이기도 하다. &amp;lt;[[병자호란(丙子胡亂)]]&amp;gt;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45일간 포위되었을 당시 강화 조건으로 척화신(斥和臣) 김상헌(金尙憲) 등을 청(淸)나라에 넘기려고 하자, 적극 반대하여 넘기지 못하게 하였다.&lt;br /&gt;
&lt;br /&gt;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고, 바로 그해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보임되었고, 1602(선조 35)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과 예문관 [[대교(待敎)]],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4011_001 『선조실록』 35년 4월 1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21_001 『선조실록』 36년 3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06022_005 『선조실록』 37년 6월 22일]) 1603년(선조 36) 예문관 대교로 있을 때 [[사관(史官)]]을 겸하여 [[사고(史庫)]]에 다녀왔고, [[조강(朝講)]]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입시(入侍)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3021_001 『선조실록』 36년 3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8010_001 『선조실록』 36년 8월 10일]) 1604년(선조 36) 예문관 봉교로 있을 때 조정에서 선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영의정[[윤승훈(尹承勳)]]을 따라 반대하다가 외직인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좌천되었으며, 이어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709022_002 『선조실록』 37년 9월 22일]) 이에 선조 말년에는 고향인 경기도 금천에서 은거하였다.&lt;br /&gt;
&lt;br /&gt;
1608년(광해군 즉위년) 다시 예문관 봉교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藝文館) [[전적(典籍)]]으로 옮겼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4025_007 『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5일]),([http://sillok.history.go.kr/id/koa_10107013_005 『광해군일기』 즉위년 7월 13일])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의 생모 추숭을 반대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03004_006 『광해군일기』 2년 3월 4일]),([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03013_001 『광해군일기』 2년 3월 13일]) [[성절사(聖節使)]]정문부(鄭文孚)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왔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12001_004 『광해군일기』 2년 12월 1일]) 1613년(광해군 5)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는데, 많은 곡식을 비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15년(광해군 7) 조정에 들어와서 호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대북파(大北派)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기 위하여 &amp;lt;정청운동(庭請運動)&amp;gt;을 전개하자, 이에 반대하다 1617년(광해군 9)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에 고향 경기도 금천에서 은거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17 「김대덕(金大德)」 이하 「김대덕묘갈」로 약칭]&lt;br /&gt;
&lt;br /&gt;
=='''인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623년(인조 1) 3월 &amp;lt;[[인조반정(仁祖反正)]]&amp;gt;이 일어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벼슬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amp;lt;[[정묘호란(丁卯胡亂)]]&amp;gt; 때 인조를 따라 강화도(江華島)에 피난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제(禮制)를 다하였다.[「김대덕묘갈」] 그리고 1630년(인조 8)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에 임명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이 되었다. 한편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요동(遼東)을 점령하자, 요동에 살던 중국 농민들이 평안도 가도(椵島) 등의 섬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파락호(擺落戶 : 패잔병) 출신 [[모문룡(毛文龍)]]이 자칭 도독이라 일컬으며 가도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후금을 공격하고자 조선에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였다. 1632년(인조 10) 김대덕은 접반사에 임명되어 가도로 가서 명(明)나라 도독(都督)모문룡을 만나 그를 접대하고, 그가 요구하는 군량미의 숫자를 최대한 줄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003012_008 『인조실록』 10년 3월 12일]) 모문룡은 조선과 명나라⋅청나라 사이에 외교적으로 골칫거리였는데, 접반사김대덕이 모문룡을 잘 구슬려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였던 것이다.&lt;br /&gt;
&lt;br /&gt;
1636년(인조 14)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이를 사양하였다. 당시 명나라로 가는 육로가 막혔기 때문에 해로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뱃길이 험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일시 중단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9006_001 『인조실록』 14년 9월 6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 일행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다가 남한산성에 45일간 오랑캐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당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이 김상헌·정온(鄭蘊) 등의 척화신들을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넘기고 빨리 화해하자며 시위하였는데,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었던 김대덕 등은 이를 적극 반대하여 중지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3_010 『인조실록』 15년 1월 23일]) 그 뒤에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자, 척화파 김상헌 등은 죽음을 면하고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나중에 돌아왔다. 1637년(인조 15)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5년 2월 22일] 1638년(인조 16)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되었다.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08029_003 『인조실록』 16년 8월 29일])&lt;br /&gt;
&lt;br /&gt;
그는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종조부 자암(自庵)김구는 조선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으로, 김대덕은 어릴 때부터 김구의 [[서법(書法)]]을 그대로 익혀 자암 서체(書體)를 발전시켰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성품은 충직하고 질박하며, 말은 어눌하였으나 정성스러웠다. 사람과 사귈 때에는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았으나, 일을 할 때에는 직언을 잘 하였으며, 처음에 벼슬길에 나갈 때부터 구차스레 권력의 향배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다.[「김대덕묘갈」]&lt;br /&gt;
&lt;br /&gt;
그의 종조부가 조선 4대 명필가의 하나인 김구인데, 김구는 중종(中宗) 때 사림파(士林派)의 거두로서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나, &amp;lt;[[기묘사화(己卯士禍)]]&amp;gt; 때 화(禍)를 당한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다. 김대덕은 어려서부터 종조부 김구의 글씨를 익혀, 7~8세 무렵부터 글을 짓고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특히 초서·예서에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신동이라 부르면서 자암의 서풍(書風)이 있다고 말하였다.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 김대덕이 초서와 예서를 잘 쓴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초청하였으나, 김대덕은 기예(技藝)로써 출세하고 싶지 않아 끝내 응하지 않았다.[「김대덕묘갈」]&lt;br /&gt;
&lt;br /&gt;
1604년(선조 37) 그가 예문관 봉교로 있을 때 [[사관(史官)]]을 겸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amp;lt;[[임진왜란(壬辰倭亂)]]&amp;gt;을 극복한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자는 논의가 한창 무르익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이 논의에 휩쓸리다시피 하고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김대덕은 홀로 이를 반대하였다. 예문관 동료들과 앉은 자리에서 항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의 직책은 붓을 들고 임금이나 신하들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자리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서 임금에게 아첨할 수는 없다” 하고, 직책의 본분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금천으로 돌아가서, 선조 말년에 몇 년 동안 은거하였다.[「김대덕묘갈」]&lt;br /&gt;
&lt;br /&gt;
광해군이 즉위하여 생모 김공빈(金恭嬪)을 추숭하려고 하자, 사간원 정언이었던 김대덕은 그 잘못을 논박하였다. 그리고 대북파의 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출하려고 하면서 조정 공론(公論)의 눈치를 보는 한편, 의주부윤(義州府尹)정준(鄭遵)을 시켜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하게 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신종(神宗)만력제(萬曆帝)가 선제(先帝 : 아버지 목종(穆宗)융경제(隆慶帝))의 귀비(貴妃)인 정씨(鄭氏)를 폐출(廢黜)하고, 목종융경제의 제 3황자인 복왕(福王)을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이첨 일당은 이것을 근거로 인목대비를 폐출하고자 하였다. 이런 가운데 1610년(광해군 2) 김대덕이 성절사정문부의 서장관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광해군은 비밀리에 김대덕을 불러 그 실상을 탐문해 오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대덕은 명나라 북경에서 돌아와서 복명(復命)하기를, “신종만력제가 정비(鄭妃)를 높이 받들고, 복왕을 우애로써 대우하기를 선제가 생존해 있을 때보다 더욱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실에 의거하여 치계하면서, 풍자적인 용어를 섞어 은유하였으므로 이이첨 일파의 계획은 중지되었다.[「김대덕묘갈」]&lt;br /&gt;
&lt;br /&gt;
1636년(인조 14) 12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포위되었을 때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 몇 사람이 성을 내려가서, 청나라 태종홍타지와 화의를 교섭하였다. 청 태종은 강화의 조건으로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파 김상헌 등 몇 사람을 결박해서 청나라 측에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싸움에 지쳐 대규모로 두 번이나 시위하면서 화의를 주장하였고, 또 강화도가 함락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등 왕자와 비빈(妃嬪)들이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청 태종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였다. 이때 김대덕이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기를, “나라는 망할지언정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붓을 휘날려 상소를 초안하였는데, 어조가 격렬하여 읽어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고, 인조도 김상헌 등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으나, 척화파 김상헌 등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김대덕묘갈」]&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경기도 금천현(衿川縣) 자경향(自敬鄕)에 있는데,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6번지인데, 고속철도 공사로 무덤을 이장하던 중에 그의 무덤에서 명기(冥器)가 출토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광명시 ‘향토 행정 사료관’에 있으며, 조선시대 명기를 부장하는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김대덕은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1617년(광해군 9) 아버지 김원록을 모시고 서울에서 금천의 자경향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그 후손들이 일직동 자경 마을에서 대대로 살았으므로, 김대덕은 광산김씨 소봉공파(蘇峯公派)의 파조가 되었다.&lt;br /&gt;
&lt;br /&gt;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관찰사성대업(成大業)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김익견(金益堅)이고, 차남은 김익중(金益重)이다. 장녀는 홍수하(洪受河)의 처가 되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lt;br /&gt;
*『인조실록(仁祖實錄)』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계곡집(谿谷集)』      &lt;br /&gt;
*『낙전당집(樂全堂集)』      &lt;br /&gt;
*『백헌집(白軒集)』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월사집(月沙集)』      &lt;br /&gt;
*『응천일록(凝川日錄)』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인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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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번(金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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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1:2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번|한글표제=김번|한자표제=金璠|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중종|집필자=이기순|자=문서(文瑞)|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79년(성종 10)|사망=1544년(중종 39)|본관=안동(安東)|주거지=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묘소소재지=경기도 양주(楊州) 도혈리(陶穴里)|증조부=김삼근(金三近)|조부=김계권(金係權)|부=김영수(金永銖)|모_외조=강릉 김씨(江陵金氏) : 김박(金博)의 딸|형제=(형)김영(金瑛) (동생)김순(金珣)|처_장인=남양 홍씨(南陽洪氏) : 홍걸(洪傑)의 딸 →(자녀)1남 1녀|자녀=(1자)김생해(金生海) (1녀)김의정(金義貞)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2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7006_004 『중종실록』 10년 7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307001_003 『중종실록』 13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807014_003 『중종실록』 18년 7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09029_005 『중종실록』 11년 9월 29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 = 6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과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문서(文瑞)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능성현령(綾城縣令)김박(金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낸 김계권(金係權)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lt;br /&gt;
&lt;br /&gt;
=='''중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98년(연산군 4) 20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amp;lt;무오사화(戊午士禍)&amp;gt;로 많은 선비가 죽는 것을 보고 대과를 포기한 채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격려와 &amp;lt;[[중종반정(中宗反正)]]&amp;gt;으로 뜻을 바꾸어 과거 준비를 하여, 35세가 되던 1513년(중종 8)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처음에 [[군자감(軍資監)]][[직장(直長)]]에 보임되었다가,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7006_004 『중종실록』 10년 7월 6일]) 이때 가뭄과 황충(蝗蟲)으로 북방 지방에서 많은 이가 굶주려 죽자, 전운사(轉運使)종사관(從事官)에 선임되어 배를 이용하여 남방 지방의 곡식을 북방으로 운반하여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당시 사람들은 뱃길을 아주 위험하게 생각하였으나, 김번은 날씨를 관찰하고 수군을 지휘하여 정해진 뱃길을 따라 수없이 곡식을 싣고 왕복하면서 하나도 패몰(敗沒)한 배가 없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6 「김번(金璠)」]&lt;br /&gt;
&lt;br /&gt;
병조 [[좌랑(佐郞)]]과 예조(禮曹) 좌랑을 역임하고,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후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307001_003 『중종실록』 13년 7월 1일]) 이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년도 안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익위(右翊衛)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807014_003 『중종실록』 18년 7월 14일]) [[병조(兵曹)]] 정랑과 예조 정랑을 거쳐,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평양부서윤의 자리가 결원(缺員)이 되자, 김번이 임명되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자, 김번은 [[둔전(屯田)]]의 실시를 건의하고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평영부서윤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김번은 격무에 시달린 끝에 큰 병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풍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긴 투병 생활을 하였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방 하나를 아주 깨끗이 청소하여 천 권의 책들을 서가에 꽂아두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1544년(중종 39) 지병으로 고향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6세였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성품이 꼿꼿하고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때에 따라 침묵을 지키기도 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였으며, 향당에서는 신의를 지키고 남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행동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그를 붙좇았다. 그는 청렴하고 남에게 후덕하였으며, 옛것에 돈독(敦篤)하였으나, 금세(今世)의 변혁을 거역하지도 않았다.&lt;br /&gt;
&lt;br /&gt;
그가 진사과에 합격하고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그는 어머니 상례(喪禮)를 끝마친 뒤에, 무오사화로 많은 관료가 죽는 것을 보고, 고향 풍산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할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를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꾸짖기를, “세 마리의 희생을 솥에 삶아서 부모를 봉양한다고 하더라도, 한번 양명(揚名)하여 어버이를 빛내는 것만 못한데, 너는 어찌하여 과거에 뽑혀서 지하에 계신 선조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였다. 그는 할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부터 스스로 분발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35세 때 문과에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1513년(중종 8)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 풍산으로 돌아와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는데, 그의 형 이조 정랑김영(金瑛)도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 풍산의 삼구정(三龜亭)에서 할머니에게 절하고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렸다. 그때 그의 형 김영과 절친한 친구였던 선산부사(善山府使)이희보(李希輔)도 참석하여 세 사람이 나란히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술잔을 바치자, 할머니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기뻐하였다.&lt;br /&gt;
&lt;br /&gt;
평양부(平壤府)는 서북 관문의 요충지로써 압록강이 중국과 경계하고 [[여진(女眞)]]과 인접하였으므로, 조빙(朝聘)하는 사신의 행차가 길에 잇달았고, 여진을 방어하는 장수의 관사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1523년(중종 18) 조선에서 군사를 보내 서북방 오랑캐를 정벌한 이후에 전염병이 온 도(道)를 휩쓸어서 경내가 마치 도륙을 당한 것처럼 시체가 사방에 쌓여 있었다. 그러므로 문무를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평양부서윤 자리를 맡길 수가 없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김반을 추천하였다. 김반은 평양부서윤으로 부임하면서 둔전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기를, “농상을 힘써 권장하여 먼저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만들고, 창고를 넉넉하게 채우며, 군졸의 명분 없는 부세를 전부 없애서,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저축된 곡식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lt;br /&gt;
&lt;br /&gt;
한편 김번은 세조의 [[국사(國師)]]였던 학조(學祖) 스님의 조카였다. 그리하여 사간원에서는 김번이 학조에게서 자랐다고 배척하며 끼워주지 않았다.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에 유가(遊街)하여 학조가 거주하던 절에 가서 [[은영연(恩榮宴)]]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고을의 향교 생도들이 선비로서 요승(妖僧)을 위해 경하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잔치를 열지 못한 일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09029_005 『중종실록』 11년 9월 29일]) 그는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구조에 몸담은 관료였기 때문에, 세조의 국사로서 엄청난 세력을 부렸던 학조 스님이 그의 큰 삼촌이라는 것이 오히려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여 [[사림(士林)]]들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에 있는데, 이희보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김번의 묘자리는 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모양의 ‘옥호저수(玉壺貯水)형’이므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사직서(社稷署)]][[영(令)]]홍걸(洪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생해(金生海)는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경명군(景明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얻었다. 장녀는 [[종부시(宗簿寺)]] 첨정김의정(金義貞)의 처가 되었으며, 1남 5녀를 낳았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lt;br /&gt;
&lt;br /&gt;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구안동(舊安東) 김씨’와 ‘신안동(新安東) 김씨’로 나누어지는데, 신안동 김씨 가운데 특히 김번의 후손들을 ‘장동 김씨(壯洞金氏)’라고 부른다. 이것은 김번이 서울의 장동(壯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는 김번의 증손자 김상헌(金尙憲)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나란히 정승이 되면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초부터 고종(高宗)이 즉위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실시한 안동 김씨가 바로 이들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중종실록(中宗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농암집(農巖集)』      &lt;br /&gt;
*『잠암일고(潛庵逸稿)』      &lt;br /&gt;
*『충재집(冲齋集)』      &lt;br /&gt;
*『염헌집(恬軒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중종]]&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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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번(金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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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1:13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번|한글표제=김번|한자표제=金璠|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중종|집필자=이기순|자=문서(文瑞)|호=|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479년(성종 10)|사망=1544년(중종 39)|본관=안동(安東)|주거지=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묘소소재지=경기도 양주(楊州) 도혈리(陶穴里)|증조부=김삼근(金三近)|조부=김계권(金係權)|부=김영수(金永銖)|모_외조=강릉 김씨(江陵金氏) : 김박(金博)의 딸|형제=(형)김영(金瑛) (동생)김순(金珣)|처_장인=남양 홍씨(南陽洪氏) : 홍걸(洪傑)의 딸 →(자녀)1남 1녀|자녀=(1자)김생해(金生海) (1녀)김의정(金義貞)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2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7006_004 『중종실록』 10년 7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307001_003 『중종실록』 13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807014_003 『중종실록』 18년 7월 14일],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09029_005 『중종실록』 11년 9월 29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 = 6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과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문서(文瑞)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능성현령(綾城縣令)김박(金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낸 김계권(金係權)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lt;br /&gt;
&lt;br /&gt;
=='''중종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498년(연산군 4) 20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amp;lt;무오사화(戊午士禍)&amp;gt;로 많은 선비가 죽는 것을 보고 대과를 포기한 채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격려와 &amp;lt;[[중종반정(中宗反正)]]&amp;gt;으로 뜻을 바꾸어 과거 준비를 하여, 35세가 되던 1513년(중종 8)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처음에 [[군자감(軍資監)]][[직장(直長)]]에 보임되었다가,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007006_004 『중종실록』 10년 7월 6일]) 이때 가뭄과 황충(蝗蟲)으로 북방 지방에서 많은 이가 굶주려 죽자, 전운사(轉運使)종사관(從事官)에 선임되어 배를 이용하여 남방 지방의 곡식을 북방으로 운반하여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당시 사람들은 뱃길을 아주 위험하게 생각하였으나, 김번은 날씨를 관찰하고 수군을 지휘하여 정해진 뱃길을 따라 수없이 곡식을 싣고 왕복하면서 하나도 패몰(敗沒)한 배가 없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6 「김번(金璠)」]&lt;br /&gt;
&lt;br /&gt;
병조 [[좌랑(佐郞)]]과 예조(禮曹) 좌랑을 역임하고,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후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307001_003 『중종실록』 13년 7월 1일]) 이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년도 안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익위(右翊衛)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807014_003 『중종실록』 18년 7월 14일]) [[병조(兵曹)]] 정랑과 예조 정랑을 거쳐,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평양부서윤의 자리가 결원(缺員)이 되자, 김번이 임명되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자, 김번은 [[둔전(屯田)]]의 실시를 건의하고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평영부서윤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김번은 격무에 시달린 끝에 큰 병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풍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긴 투병 생활을 하였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방 하나를 아주 깨끗이 청소하여 천 권의 책들을 서가에 꽂아두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1544년(중종 39) 지병으로 고향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6세였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성품이 꼿꼿하고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때에 따라 침묵을 지키기도 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였으며, 향당에서는 신의를 지키고 남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행동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그를 붙좇았다. 그는 청렴하고 남에게 후덕하였으며, 옛것에 돈독(敦篤)하였으나, 금세(今世)의 변혁을 거역하지도 않았다.&lt;br /&gt;
&lt;br /&gt;
그가 진사과에 합격하고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그는 어머니 상례(喪禮)를 끝마친 뒤에, 무오사화로 많은 관료가 죽는 것을 보고, 고향 풍산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할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를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꾸짖기를, “세 마리의 희생을 솥에 삶아서 부모를 봉양한다고 하더라도, 한번 양명(揚名)하여 어버이를 빛내는 것만 못한데, 너는 어찌하여 과거에 뽑혀서 지하에 계신 선조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였다. 그는 할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부터 스스로 분발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35세 때 문과에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lt;br /&gt;
&lt;br /&gt;
1513년(중종 8)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 풍산으로 돌아와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는데, 그의 형 이조 정랑김영(金瑛)도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 풍산의 삼구정(三龜亭)에서 할머니에게 절하고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렸다. 그때 그의 형 김영과 절친한 친구였던 선산부사(善山府使)이희보(李希輔)도 참석하여 세 사람이 나란히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술잔을 바치자, 할머니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기뻐하였다.&lt;br /&gt;
&lt;br /&gt;
평양부(平壤府)는 서북 관문의 요충지로써 압록강이 중국과 경계하고 [[여진(女眞)]]과 인접하였으므로, 조빙(朝聘)하는 사신의 행차가 길에 잇달았고, 여진을 방어하는 장수의 관사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1523년(중종 18) 조선에서 군사를 보내 서북방 오랑캐를 정벌한 이후에 전염병이 온 도(道)를 휩쓸어서 경내가 마치 도륙을 당한 것처럼 시체가 사방에 쌓여 있었다. 그러므로 문무를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평양부서윤 자리를 맡길 수가 없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김반을 추천하였다. 김반은 평양부서윤으로 부임하면서 둔전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기를, “농상을 힘써 권장하여 먼저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만들고, 창고를 넉넉하게 채우며, 군졸의 명분 없는 부세를 전부 없애서,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저축된 곡식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lt;br /&gt;
&lt;br /&gt;
한편 김번은 세조의 [[국사(國師)]]였던 학조(學祖) 스님의 조카였다. 그리하여 사간원에서는 김번이 학조에게서 자랐다고 배척하며 끼워주지 않았다.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에 유가(遊街)하여 학조가 거주하던 절에 가서 [[은영연(恩榮宴)]]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고을의 향교 생도들이 선비로서 요승(妖僧)을 위해 경하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잔치를 열지 못한 일도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1109029_005 『중종실록』 11년 9월 29일]) 그는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구조에 몸담은 관료였기 때문에, 세조의 국사로서 엄청난 세력을 부렸던 학조 스님이 그의 큰 삼촌이라는 것이 오히려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여 [[사림(士林)]]들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에 있는데, 이희보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김번의 묘자리는 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모양의 ‘옥호저수(玉壺貯水)형’이므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lt;br /&gt;
&lt;br /&gt;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사직서(社稷署)]][[영(令)]]홍걸(洪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생해(金生海)는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경명군(景明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얻었다. 장녀는 [[종부시(宗簿寺)]] 첨정김의정(金義貞)의 처가 되었으며, 1남 5녀를 낳았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lt;br /&gt;
&lt;br /&gt;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구안동(舊安東) 김씨’와 ‘신안동(新安東) 김씨’로 나누어지는데, 신안동 김씨 가운데 특히 김번의 후손들을 ‘장동 김씨(壯洞金氏)’라고 부른다. 이것은 김번이 서울의 장동(壯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는 김번의 증손자 김상헌(金尙憲)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나란히 정승이 되면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초부터 고종(高宗)이 즉위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실시한 안동 김씨가 바로 이들이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중종실록(中宗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농암집(農巖集)』      &lt;br /&gt;
*『잠암일고(潛庵逸稿)』      &lt;br /&gt;
*『충재집(冲齋集)』      &lt;br /&gt;
*『염헌집(恬軒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중종]]&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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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수(金睟)</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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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0:45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김수|한글표제=김수|한자표제=金睟|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광해군|집필자=이기순|자=자앙(子盎)|호=몽촌(夢村)|봉작=|시호=소의(昭懿)|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47년(명종 2) 6월 25일|사망=1615년(광해군 7) 8월 17일|본관=안동(安東)|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경기도 금천(衿川) 번당리(樊堂里)의 선영(先塋)|증조부=김희수(金希壽)|조부=김노(金魯)|부=김홍도(金弘度)|모_외조=한산 이씨(韓山李氏) : 이계백(李繼伯)의 딸|형제=(형)김첨(金瞻)|처_장인=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호문(成好問)의 딸 →(자녀)4남 2녀|자녀=(1자)김경립(金敬立) (2자)김의립(金義立) (3자)김신립(金信立) (4자)? (1녀)박호(朴箎)의 처 (2녀)? (서1자)김태산(金泰山)|유명자손=|저술문집=『몽촌집(夢村集)』|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336|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0609026_003 『선조실록』 6년 9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709006_003 『선조실록』 7년 9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3_001 『선조실록』 16년 8월 13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1_002 『선조실록』 16년 8월 1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2012_002 『선조실록』 16년 2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1705008_004 『선조실록』 17년 5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1903001_001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007006_001 『선조실록』 20년 7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206026_001 『선조실록』 22년 6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305021_001 『선조실록』 23년 5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306001_001 『선조수정실록』 23년 6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2006_001 『선조실록』 24년 2월 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7001_006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6001_037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1 『선조실록』 25년 8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6 『선조실록』 25년 8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12021_002 『선조실록』 25년 12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5025_003 『선조실록』 29년 5월 25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5001_002 『선조실록』 33년 5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7023_002 『선조실록』 35년 7월 23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11010_009 『선조실록』 35년 11월 10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12017_002 『선조실록』 36년 12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1018_002 『선조실록』 40년 1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13_004 『광해군일기』 5년 5월 13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47년(명종 2)∼1615년(광해군 7) = 6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자앙(子盎)이고, 호는 몽촌(夢村)이며,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김홍도(金弘度)]]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김노(金魯)]]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희수(金希壽)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lt;br /&gt;
&lt;br /&gt;
=='''선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그 뒤에 6년이 지나 27세가 되던 1573년(선조 6)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http://sillok.history.go.kr/id/kna_10609026_003 『선조실록』 6년 9월 26일]) 처음에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와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0709006_003 『선조실록』 7년 9월 6일]) 이어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가 되었으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 호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고,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1579년(선조 12) 가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동지(冬至)를 하례하고 돌아온 후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 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홍문관 수찬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그때 선조가 김수에게 명하여 『십구사략(十九史畧)』을 개수(改修)하고 주석을 첨가하게 하였는데, 그가 발문(跋文)도 썼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58 「김수(金睟)」 이하 「김수비명」]&lt;br /&gt;
&lt;br /&gt;
1582년(선조 15)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 좌랑이 되었고, 1583년(선조 16)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인사를 공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3_001 『선조실록』 16년 8월 13일]) 암행어사가 되어서는 평안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왔으며,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해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 정랑으로서 [[도순찰사(都巡察使)]][[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1_002 『선조실록』 16년 8월 1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2012_002 『선조실록』 16년 2월 12일]) 1584년(선조 17) 김수가 경원부에서 병을 심하게 앓자, 선조가 하교하기를, “김수는 아까운 사람이니, 특별히 의약을 보내어 [[구료(救療)]]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특별한 대우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705008_004 『선조실록』 17년 5월 8일]) 가을에 의정부 검상(檢詳)과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와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 이어 왕명을 받들고 서로(西路)를 순찰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1586년(선조 1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차례로 승진하여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1903001_001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1587년(선조 20) 가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사고로 면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007006_001 『선조실록』 20년 7월 6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변방의 일을 잘 아는 대신을 뽑아서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할 때 특별히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206026_001 『선조실록』 22년 6월 26일]) 1590년(선조 23)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병조 [[참판(參判)]]을 거쳐 그해 가을 병조 판서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305021_001 『선조실록』 23년 5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306001_001 『선조수정실록』 23년 6월 1일]) 그러나 김수가 해면을 간청하였으므로,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특별히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2006_001 『선조실록』 24년 2월 6일])&lt;br /&gt;
&lt;br /&gt;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amp;lt;[[건저(建儲)]]) 문제&amp;gt;로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2파로 나눠질 때 김수는 남인이 되었다가 시의(時議)에 배척을 받아 그해 여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7001_006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그런데 김수가 경상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amp;lt;[[임진왜란(壬辰倭亂)]]&amp;gt;이 일어났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광(李洸)과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자 김수는 경상도에서 100여 명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근왕병이 용인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갔는데, 이때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6001_037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해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1 『선조실록』 25년 8월 7일]) 사람들은 김수의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적과 싸우지도 않은 채 왜적을 피해 도망갔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에서 해직되어 돌아온 김수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6 『선조실록』 25년 8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12021_002 『선조실록』 25년 12월 21일])&lt;br /&gt;
&lt;br /&gt;
1593년(선조 26)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과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빈객(右賓客)과 경연청(經筵廳)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중추부 지사를 사직하였으나, 1596년(선조 29)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지사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5025_003 『선조실록』 29년 5월 25일]) 그때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량미 징수를 담당하여 공급하였다. 1598년(선조 31) 병 때문에 한직인 중추부 지사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호조 판서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 중추부 지사로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5001_002 『선조실록』 33년 5월 1일]) 이어 곧 형조 판서로 개차되었고, 겨울에 다시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7023_002 『선조실록』 35년 7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11010_009 『선조실록』 35년 11월 10일]) 1603년(선조 36) 봄 숭정대부(崇政大夫) 중추부 [[판사(判事)]]에 임명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12017_002 『선조실록』 36년 12월 17일]) 1604년(선조 37) 임기가 만료되어, 돈녕부(敦寧府) 판사로 옮겼다. 이어 1607년(선조 40)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1608년(선조 41)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1018_002 『선조실록』 40년 1월 18일])&lt;br /&gt;
&lt;br /&gt;
=='''광해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조사(詔使)]]의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판사 임명되었다.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그의 손자 김비(金祕)가 &amp;lt;강변칠우(江邊七友)&amp;gt;에 가담하였다고 무고(誣告)를 당하여 체포되어 곤장을 맞으며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옥에서 죽었다. 이 사건은 &amp;lt;계축옥사(癸丑獄事)&amp;gt;로 이어져서 북인이 남인과 서인을 죽이거나 축출하였는데, 남인이던 김수 역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하였다.[비문],([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13_004 『광해군일기』 5년 5월 13일]) 이때 김수는 나이가 많아서 이미 건망증을 앓아서 수년 동안 직무를 폐기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1615년(광해군 7) 8월 17일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9세였다.[「김수비명」] 한편 김수는 가학(家學)을 익혀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문집으로는 『몽촌집(夢村集)』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성품이 치밀하고 영리하며, 행동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 부모를 잃었으므로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13세에 스승과 친구를 따라 놀았는데, 뛰어나게 영리하여 글과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었다. 조금 장성해서는 학문에 뜻을 두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나이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벼슬하기 전에 추악한 무리를 잘 처치하였으므로 선비가 모두 존경하고 그를 따랐다. 벼슬길에 올라서 명망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면서 강론이 정확하고 행동이 상도(常度)가 있었다. 임금에게 선한 것을 아뢰고 악한 일을 못하도록 한 것이 많았다. 그는 법도에 따라 충신(忠信)을 지키고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그는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곳간에는 저축한 곡식도 없었다. 그는 오직 직무에만 부지런하고 충실하여, 관아에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바람도 피하지 않았는데, 공무를 마치면 남과 만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김수가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임진왜란으로 팔도가 폐허가 되었고, 명나라 장수와 관리는 10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왜적과 대치하고 있는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을 징수할 때 모두 군용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써서, 군량미를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한편, 밤낮으로 관아에서 회계를 하여 군에서 쓰는 물건은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애를 써서 공급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김수의 회계 능력을 평가하기를, “수 십 년 내에 그 임무를 맡았던 사람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힌다”고 칭찬하였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김수의 집안은 모두 문학과 서예로 후세에 저명하였다. 증조부 김희수는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고,[『해동잡록(海東雜錄)』 상권] 조부 김노도 필법(筆法)이 대를 이어 아름다웠으므로, 세상에서 김희수와 김노 부자를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같다고 일컬었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유명조선국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공묘갈명(有明朝鮮國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墓碣銘)」] 아버지 김홍도는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와 별시 문과에서 모두 장원하여, 뛰어난 재주와 학문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김홍도 또한 집안의 풍도(風度)를 이어받아 글씨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김수는 젊어서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해서 그 책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선조가 그에게 『십팔사략』을 개수하고 주석을 달게 한 후 그 끝에 발문을 짓게 하였다. 당시 그의 동료들은 “신하를 알아보는 데에는 임금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4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김수도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시호는 소의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번당리(樊堂里)의 선영에 있는데, [[신흠(申欽)]]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lt;br /&gt;
&lt;br /&gt;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광흥창(廣興倉)]][[수(守)]]성호문(成好問)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경립(金敬立)은 호조 좌랑을 지냈고 차남 김의립(金義立)은 학생이며, 3남 김신립(金信立)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4남은 일찍 죽었다. 김태산(金泰山)은 측실 소생이다. 장녀는 교리 박호(朴箎)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일찍 죽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상촌집(象村集)』      &lt;br /&gt;
*『퇴계집(退溪集)』      &lt;br /&gt;
*『서애집(西厓集)』      &lt;br /&gt;
*『백사집(白沙集)』      &lt;br /&gt;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lt;br /&gt;
*『고대일록(孤臺日錄)』      &lt;br /&gt;
*『송자대전(宋子大全)』      &lt;br /&gt;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lt;br /&gt;
*『성호전집(星湖全集)』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국조보감(國朝寶鑑)』      &lt;br /&gt;
*『해동잡록(海東雜錄)』      &lt;br /&gt;
*『호음잡고(湖陰雜稿)』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광해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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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수(金睟)</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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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0:34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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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47년(명종 2)∼1615년(광해군 7) = 69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자앙(子盎)이고, 호는 몽촌(夢村)이며,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김홍도(金弘度)]]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김노(金魯)]]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희수(金希壽)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lt;br /&gt;
&lt;br /&gt;
=='''선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그 뒤에 6년이 지나 27세가 되던 1573년(선조 6) 알성(謁聖)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http://sillok.history.go.kr/id/kna_10609026_003 『선조실록』 6년 9월 26일]) 처음에 예문관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와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0709006_003 『선조실록』 7년 9월 6일]) 이어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가 되었으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 호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고,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1579년(선조 12) 가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동지(冬至)를 하례하고 돌아온 후 승문원(承文院) [[교검(校檢)]]에 임명되었다. 1580년(선조 13) 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홍문관 수찬과 홍문관 [[교리(校理)]]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그때 선조가 김수에게 명하여 『십구사략(十九史畧)』을 개수(改修)하고 주석을 첨가하게 하였는데, 그가 발문(跋文)도 썼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58 「김수(金睟)」 이하 「김수비명」]&lt;br /&gt;
&lt;br /&gt;
1582년(선조 15)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이조 좌랑이 되었고, 1583년(선조 16)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인사를 공평하게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3_001 『선조실록』 16년 8월 13일]) 암행어사가 되어서는 평안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왔으며, 1583년 [[번호(藩胡)]]가 침입해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 정랑으로서 [[도순찰사(都巡察使)]][[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8011_002 『선조실록』 16년 8월 11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1602012_002 『선조실록』 16년 2월 12일]) 1584년(선조 17) 김수가 경원부에서 병을 심하게 앓자, 선조가 하교하기를, “김수는 아까운 사람이니, 특별히 의약을 보내어 [[구료(救療)]]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특별한 대우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705008_004 『선조실록』 17년 5월 8일]) 가을에 의정부 검상(檢詳)과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와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 이어 왕명을 받들고 서로(西路)를 순찰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1586년(선조 19)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차례로 승진하여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1903001_001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1587년(선조 20) 가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사고로 면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007006_001 『선조실록』 20년 7월 6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변방의 일을 잘 아는 대신을 뽑아서 삼도(三道)로 나누어 파견할 때 특별히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206026_001 『선조실록』 22년 6월 26일]) 1590년(선조 23)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병조 [[참판(參判)]]을 거쳐 그해 가을 병조 판서가 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305021_001 『선조실록』 23년 5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306001_001 『선조수정실록』 23년 6월 1일]) 그러나 김수가 해면을 간청하였으므로, 형조 판서로 옮겼다가 특별히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2006_001 『선조실록』 24년 2월 6일])&lt;br /&gt;
&lt;br /&gt;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amp;lt;[[건저(建儲)]]) 문제&amp;gt;로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2파로 나눠질 때 김수는 남인이 되었다가 시의(時議)에 배척을 받아 그해 여름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7001_006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그런데 김수가 경상도 경계에 이르렀을 때 &amp;lt;[[임진왜란(壬辰倭亂)]]&amp;gt;이 일어났다.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광(李洸)과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자 김수는 경상도에서 100여 명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근왕병이 용인에서 왜군에게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갔는데, 이때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6001_037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해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도 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1 『선조실록』 25년 8월 7일]) 사람들은 김수의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적과 싸우지도 않은 채 왜적을 피해 도망갔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경상도관찰사에서 해직되어 돌아온 김수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7_006 『선조실록』 25년 8월 7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12021_002 『선조실록』 25년 12월 21일])&lt;br /&gt;
&lt;br /&gt;
1593년(선조 26)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참찬(右參贊)과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빈객(右賓客)과 경연청(經筵廳) [[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1595년(선조 28) 중추부 지사를 사직하였으나, 1596년(선조 29)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지사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5025_003 『선조실록』 29년 5월 25일]) 그때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를 충당하기 위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량미 징수를 담당하여 공급하였다. 1598년(선조 31) 병 때문에 한직인 중추부 지사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호조 판서가 되었고, 1602년(선조 35)에 중추부 지사로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5001_002 『선조실록』 33년 5월 1일]) 이어 곧 형조 판서로 개차되었고, 겨울에 다시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7023_002 『선조실록』 35년 7월 23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11010_009 『선조실록』 35년 11월 10일]) 1603년(선조 36) 봄 숭정대부(崇政大夫) 중추부 [[판사(判事)]]에 임명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12017_002 『선조실록』 36년 12월 17일]) 1604년(선조 37) 임기가 만료되어, 돈녕부(敦寧府) 판사로 옮겼다. 이어 1607년(선조 40)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1608년(선조 41)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4001018_002 『선조실록』 40년 1월 18일])&lt;br /&gt;
&lt;br /&gt;
=='''광해군 시대 활동'''==&lt;br /&gt;
&lt;br /&gt;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조사(詔使)]]의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1610년(광해군 2)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판사 임명되었다. 그런 가운데 1613년(광해군 5) 그의 손자 김비(金祕)가 &amp;lt;강변칠우(江邊七友)&amp;gt;에 가담하였다고 무고(誣告)를 당하여 체포되어 곤장을 맞으며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옥에서 죽었다. 이 사건은 &amp;lt;계축옥사(癸丑獄事)&amp;gt;로 이어져서 북인이 남인과 서인을 죽이거나 축출하였는데, 남인이던 김수 역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하였다.[비문],([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13_004 『광해군일기』 5년 5월 13일]) 이때 김수는 나이가 많아서 이미 건망증을 앓아서 수년 동안 직무를 폐기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1615년(광해군 7) 8월 17일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9세였다.[「김수비명」] 한편 김수는 가학(家學)을 익혀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 문집으로는 『몽촌집(夢村集)』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성품이 치밀하고 영리하며, 행동이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 부모를 잃었으므로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13세에 스승과 친구를 따라 놀았는데, 뛰어나게 영리하여 글과 시부(詩賦)를 지을 수 있었다. 조금 장성해서는 학문에 뜻을 두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나이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벼슬하기 전에 추악한 무리를 잘 처치하였으므로 선비가 모두 존경하고 그를 따랐다. 벼슬길에 올라서 명망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면서 강론이 정확하고 행동이 상도(常度)가 있었다. 임금에게 선한 것을 아뢰고 악한 일을 못하도록 한 것이 많았다. 그는 법도에 따라 충신(忠信)을 지키고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그는 지위가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나 사사로이 청탁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곳간에는 저축한 곡식도 없었다. 그는 오직 직무에만 부지런하고 충실하여, 관아에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바람도 피하지 않았는데, 공무를 마치면 남과 만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김수가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을 때 임진왜란으로 팔도가 폐허가 되었고, 명나라 장수와 관리는 10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왜적과 대치하고 있는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을 징수할 때 모두 군용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써서, 군량미를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한편, 밤낮으로 관아에서 회계를 하여 군에서 쓰는 물건은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애를 써서 공급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김수의 회계 능력을 평가하기를, “수 십 년 내에 그 임무를 맡았던 사람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힌다”고 칭찬하였다.[「김수비명」]&lt;br /&gt;
&lt;br /&gt;
김수의 집안은 모두 문학과 서예로 후세에 저명하였다. 증조부 김희수는 특히 [[해서(楷書)]]에 능하였고,[『해동잡록(海東雜錄)』 상권] 조부 김노도 필법(筆法)이 대를 이어 아름다웠으므로, 세상에서 김희수와 김노 부자를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와 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같다고 일컬었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유명조선국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김공묘갈명(有明朝鮮國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金公墓碣銘)」] 아버지 김홍도는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와 별시 문과에서 모두 장원하여, 뛰어난 재주와 학문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다. 김홍도 또한 집안의 풍도(風度)를 이어받아 글씨를 잘 썼으며 그림에도 능했다고 하는데,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김수는 젊어서 『십팔사략』 읽기를 좋아해서 그 책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선조가 그에게 『십팔사략』을 개수하고 주석을 달게 한 후 그 끝에 발문을 짓게 하였다. 당시 그의 동료들은 “신하를 알아보는 데에는 임금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4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김수도 문장과 글씨가 뛰어났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시호는 소의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번당리(樊堂里)의 선영에 있는데, [[신흠(申欽)]]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lt;br /&gt;
&lt;br /&gt;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광흥창(廣興倉)]][[수(守)]]성호문(成好問)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경립(金敬立)은 호조 좌랑을 지냈고 차남 김의립(金義立)은 학생이며, 3남 김신립(金信立)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4남은 일찍 죽었다. 김태산(金泰山)은 측실 소생이다. 장녀는 교리 박호(朴箎)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일찍 죽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상촌집(象村集)』      &lt;br /&gt;
*『퇴계집(退溪集)』      &lt;br /&gt;
*『서애집(西厓集)』      &lt;br /&gt;
*『백사집(白沙集)』      &lt;br /&gt;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lt;br /&gt;
*『고대일록(孤臺日錄)』      &lt;br /&gt;
*『송자대전(宋子大全)』      &lt;br /&gt;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lt;br /&gt;
*『성호전집(星湖全集)』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국조보감(國朝寶鑑)』      &lt;br /&gt;
*『해동잡록(海東雜錄)』      &lt;br /&gt;
*『호음잡고(湖陰雜稿)』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광해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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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광(李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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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4T02:10:06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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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gt;&lt;br /&gt;
&lt;br /&gt;
{{인명사전|대표표제=이광|한글표제=이광|한자표제=李洸|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인물|유형=문신|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집필자=이현숙|자=사무(士武)|호=우파(雨波), 우계산인(雨溪散人)|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41년(중종 36) 12월 8일|사망=1607년(선조 40)|본관=덕수(德水)|주거지=서울|묘소소재지=지금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증조부=이의무(李宜茂)|조부=이행(李荇)|부=이원상(李元祥)|모_외조=평산 신씨(平山申氏) : 신옥형(申玉衡)의 딸|형제=(형)이섭(李涉), 이용(李溶)|처_장인=(첫째 부인)덕산 이씨(德山李씨) : 이증영(李增榮)의 딸 →(자녀)3남 1녀 (둘째 부인)단양 우씨(丹陽禹氏) : 우담(禹湛)의 딸|자녀=(1자)이안지(李安止) (2자)이안직(李安直) (3자)이안진(李安眞) (1녀)남철(南澈)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우계집(雨溪集)』|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1414|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b_11905001_001 『선조수정실록』 19년 5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12018_001 『선조실록』 21년 12월 1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212001_021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303001_002 『선조수정실록』 23년 3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3001_001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1_002 『선조실록』 25년 6월 2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24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7001_002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7001_003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7022_006 『선조실록』 25년 7월 22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8001_005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9008_001 『선조실록』 25년 9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26_004 『선조실록』 26년 10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27_002 『선조실록』 26년 10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2008_006 『선조실록』 27년 2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9001_013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lt;br /&gt;
&lt;br /&gt;
=='''총론'''==&lt;br /&gt;
&lt;br /&gt;
[1541년(중종 36)∼1607년(선조 40) = 6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사무(士武)이고, 호는 우파(雨波)·우계(雨溪), 또는 우계산인(雨溪散人)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인데, 우계공파(雨溪公派)의 파조이다.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도사(都事)이원상(李元祥)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신옥형(申玉衡)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이행(李荇)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이의무(李宜茂)이다. 이조 정랑(正郞)이원록(李元祿)의 조카이기도 하다.&lt;br /&gt;
&lt;br /&gt;
=='''선조 전반기 활동'''==&lt;br /&gt;
&lt;br /&gt;
1567년(선조 즉위년)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 7)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榜目)』] 바로 성균관(成均館) 권지(權知)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 사록(司祿)으로 전임되었고, 1577년(선조 10)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그는 지위 높은 한 관리의 과실을 숨김없이 기록하였는데, 동료가 그 말을 누설하면서, 결국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조정으로 들어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가 형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 15)에는 예조 좌랑과 사헌부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인 1583년(선조 16)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는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면서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으며, 이어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다. 1584년(선조 17) 병조정랑(正郞)을 거쳐 장악원(掌樂院) 정(正)으로 전임되었으며, 함경도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가 백성들의 구호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다. 1585년(선조 18)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도 영흥부사(永興府使)가 되었다. 1586년(선조 19)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승진하였는데, 그해 5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서 함경도순찰사(咸鏡道巡察使)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1905001_001 『선조수정실록』 19년 5월 1일])&lt;br /&gt;
&lt;br /&gt;
1588년(선조 21) 12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112018_001 『선조실록』 21년 12월 18일]) 1589년(선조 22) 2월 이광은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의 실력을 알아보고 “그대와 같은 인재가 어찌하여 이토록 굴욕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하며 조정에 보고하여, 그를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212001_021 『선조수정실록』 22년 12월 1일]) 그해 겨울 &amp;lt;정여립(鄭汝立)의 난&amp;gt;이 일어나자, 그 문하생과 도당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고, 반역에 연루되어 체포된 죄인들을 심문하였다. 이때 그는 혐의가 적은 사람들을 임의로 석방해주었는데, 이 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303001_002 『선조수정실록』 23년 3월 1일]) 1591년(선조 24) 호조 참판(參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그해 3월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면서,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를 겸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403001_001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lt;br /&gt;
&lt;br /&gt;
=='''선조 후반기 활동'''==&lt;br /&gt;
&lt;br /&gt;
1592년(선조 25) 4월 14일 &amp;lt;임진왜란(壬辰倭亂)&amp;gt;이 일어났다. 왜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였면서,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에 관찰사이광은 전라도에서 근왕병(勤王兵) 4만여 명을 차출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한편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삼고,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김수(金睟)와 함께 하삼도(下三道) 군사와 연합하여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1_002 『선조실록』 25년 6월 21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5001_024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하삼도 연합군이 무려 6~7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당시 조정에서는 하삼도 연합군이 반드시 서울을 수복하리라고 크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하삼도 연합군은 임천을 거쳐 전진하던 가운데 용인(龍仁)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전라도관찰사이광은 흩어진 군사를 다시 수습하여 급히 전라도로 돌아왔다. 이때 왜군이 전라도의 전주·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관찰사이광은 급히 광주목사(光州牧使)권율(權慄)을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로 삼았다. 권율은 웅치(熊峙)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또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이정란(李廷鸞)의 전주 의병과 함께 힘을 합쳐 격퇴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7001_002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7001_003 『선조수정실록』 25년 7월 1일]) 이후 대간에서는 관찰사이광이 3도 연합군을 이끌고 용인에서 패전하였다며 탄핵을 하였고, 이에 이광은 파직되어 백의종군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7022_006 『선조실록』 25년 7월 22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8001_005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그러나 3도 관찰사 가운데 전라도관찰사이광의 죄가 가장 크다고 하여, 다시 체포되어 하옥되었으며, 의금부에서 엄한 국문(鞫問)을 받고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9008_001 『선조실록』 25년 9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26_004 『선조실록』 26년 10월 26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0027_002 『선조실록』 26년 10월 27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2008_006 『선조실록』 27년 2월 8일]),([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9001_013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그리고 1594년(선조 27) 2월 사면을 받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lt;br /&gt;
&lt;br /&gt;
1597년(선조 30) 57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전라도 고부(古阜)로 낙향하였다. 그의 외갓집은 대대로 전라도 고부군(古阜郡) 우일향(雨日鄕)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만년에 이곳 우일향으로 내려가 우계(雨溪)에 영파정(迎波亭)을 짓고 백발회(白髮會)를 만들어, 촌로들과 어울려 낚시를 하고 산수를 즐기며 스스로 호를 우계산인(雨溪散人)이라고 불렀다. 1601년(선조 34) 61세 때 중풍(中風)에 걸려 6년 동안 고생하다가, 1607년(선조 40) 1월 19일 고부군 우일향(雨日鄕)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7세였다. 그는 죽어서 우계산(雨溪山)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충청도 면천(沔川)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lt;br /&gt;
&lt;br /&gt;
문집으로는 &amp;lt;우계집(牛溪集)&amp;gt;이 남아 있다.&lt;br /&gt;
&lt;br /&gt;
=='''임진왜란 때 하삼도 근왕병의 용인 대패'''==&lt;br /&gt;
&lt;br /&gt;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적이 쳐들어와서 동래성(東萊城)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은 즉시 전라도 군사를 통솔하여 왜적을 토벌하겠다고 장계(狀啓)를 하자, 선조가 직접 서찰을 내려 격려하였다. 서울로 향하던 그의 군사가 공주(公州)에 이르렀을 때, 행관(行官 : 전령)이 서울에서 돌아와 통곡하면서 왜적이 서울을 이미 점령하였다는 것과 임금은 이미 도성을 빠져나가 평안도 지방으로 파천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군사들이 흩어져 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관찰사이광이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이산(尼山)의 석교(石橋)를 지키게 하고, 직접 군사들을 설득하며 타일러 다시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그러나 난병(亂兵)들이 칼을 빼들고 장수(將帥)들을 에워싸서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므로, 이광도 전주(全州)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부산에서 서울로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한 다음에 북쪽으로 다시 진격하고 있었다.&lt;br /&gt;
&lt;br /&gt;
그러나 왜적이 아직 전라도 지역은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이광은 여러 고을에 명령하여 요해지(要害地)를 나누어 지키게 하는 한편,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타이르고 설득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은 다시 왜적과 싸우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해 5월 그는 전라도병마사곽영(郭嶸)과 함께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켜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군사 4만여 명을 차출하여 군사 편제를 짠 후 북정(北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충청도관찰사윤선각과 경상도관찰사김수도 함께 근왕병을 일으켜 연합 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하삼도의 연합군이 6~7만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서울로 진격하여 수원(水原)에 주둔하니, 군대의 위용(威容)이 매우 성대하였다. 행재소(行在所)의 선조도 이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들이 반드시 왜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수복하리라고 기대하였다.&lt;br /&gt;
&lt;br /&gt;
3도의 관찰사와 지휘자들이 모여서 작전을 의논하던 중 어떤 장수가 말하기를, “왜적이 이미 서울을 점거하고 있으며 흉악한 예봉(銳鋒)을 한창 떨치고 있는 반면에, 우리 군사들은 괜히 병력이 많다고 허세만 부릴 뿐이지, 실제로는 전투에 익숙하지 못하니, 왜적과 직접 상대해서 싸우게 되면, 분명히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독산성(禿山城)을 굳건하게 지키며 왜적을 유인하여 싸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승세를 틈타서 서울로 진격한다면 온전하게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지만 관찰사이광은 “군부(君父)께서 위태롭게 적에게 쫓겨 나라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번신(藩臣)이 군사를 거느리고 시간을 지체한다면 안 될 일이다. 마땅히 적을 향해 곧장 육박해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 군사가 설령 적과 대적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도(西道)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길목을 차단하여 행재소를 보호하는 하나의 계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곧장 한강(漢江)의 호현(狐峴)까지 진격해 들어가고 나서, 그 다음 일을 의논토록 하자.”고 명령하였다.&lt;br /&gt;
&lt;br /&gt;
이에 하삼도 연합군은 서둘러 서울로 향하여 진군하였는데, 전라도 군대가 앞장서고, 충청도와 경상도 군대가 그 뒤를 따랐다. 연합군이 마침내 용인의 왜적을 향해 진격하는 상황에서 왜적의 선봉대가 갑자기 전방의 전라도 군사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때 전라도 군사의 선봉장인 백광언(白光彦)과 이지시(李之詩)가 왜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왜적의 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전라도병마사곽영의 군대가 먼저 패배하였고, 후방의 하삼도 군대도 마침내 궤멸하였는데, 그 형세가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앞서 작전을 의논할 때 경험 많은 장수가 주장한 의견이 과연 그대로 적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삼도의 관찰사들은 황급히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자기 감영(監營)으로 돌아갔다. 관찰사이광도 뿔뿔이 흩어진 전라도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전주로 돌아왔는데, 왜적이 전주와 금산(錦山)의 경계까지 추격해왔다. 이런 가운데 전라도병마사곽영이 전사하면서 군사를 통솔할 사람이 없었다. 관찰사이광은 광주목사권율이 장수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첩문(牒文)을 보내 그를 전라도병마사로 삼아 왜적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의병장 황진(黃進) 등을 보내 웅치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는데, 일본인들은 웅치 전투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서 크게 패배한 3대 전투 중의 하나로 꼽는다. 한편 또 다른 왜군이 전주성(全州城)을 공격하자, 관찰사이광은 의병장 이정란으로 하여금 전주의 의병들을 이끌고 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대항하여 성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산골에 군사를 배치하여 밤에 횃불을 죽 늘어세우고 서로 호응하여 신호를 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은 골짜기마다 군사가 진을 치고 있다고 판단하여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전라도관찰사이광은 비록 하삼도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수복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전라도를 왜적의 침임에서 보호하는 데는 성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권율과 이순신 같은 명장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하였다.&lt;br /&gt;
&lt;br /&gt;
용인에서 패전하고 하삼도 군사가 후퇴할 때, 관찰사이광은 충청도관찰사윤선각과 경상도관찰사김수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퇴각하였는데, 서로 작별 인사를 하면서 “우리들이 장차 무슨 형률을 적용 받아 처벌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경상도관찰사김수가 말하기를, “나는 본도(本道)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였고 지금 또 패배하였으니, 나야말로 중하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고, 충청도관찰사윤선각은 “경기는 나의 지역과 경계하고 있고, 병력은 실제로 내가 유도(誘導)하였으니, 내가 수죄(首罪)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이광이 웃으면서 “두 분은 명문가의 후계자이니,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나야말로 책임이 막중한데 큰 죄를 지었으니, 아마도 위태로울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이 적중하였다.&lt;br /&gt;
&lt;br /&gt;
그해 가을 대간에서는 관찰사이광에게 하삼도 연합군이 용인에서 왜적에게 패배한 죄를 물어 그를 파직시키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3도의 관찰사 가운데 이광의 죄가 가장 크다며 체포하여 엄한 국문을 하고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또 다시 국문할 것을 명하면서 이광은 구금(拘禁)되어 신문(訊問)을 받으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근왕병에 큰 기대를 걸었던 선조가 용인의 패배를 가장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1594년(선조 27) 봄 나라에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때 이광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광은 원래 남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과 힘만으로 출세하였을 뿐 아니라,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업적을 쌓아올렸다. 그러므로 조정 안팎의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큰 기대를 갖고 있었고, 선조의 믿음과 사랑도 특별하였다. 그러나 용인 전투에서 한 번 패배를 당한 이후에 종신토록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lt;br /&gt;
&lt;br /&gt;
=='''성품과 일화'''==&lt;br /&gt;
&lt;br /&gt;
이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인의 의표(儀表)를 지니고 있었으며, 명랑하면서 후덕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함이 남달라서 문사(文思)에 탁월하였다.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시구(詩句)를 지을 줄 알았는데, 전라도 지방의 큰 죽순(竹筍)을 보고 “대나무가 다 커서는 옷이 없는데, 작을 때에는 옷이 있구나[竹大無衣小有衣]”하고 읊었다고 한다.&lt;br /&gt;
&lt;br /&gt;
이광은 1541년(중종 36) 12월 8일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집안은 대대로 전라도 고부군 우일향에서 살았다. 우일(雨日)은 속칭 우계라고도 불렀으며, 그는 우계산을 무척 사랑하였다. 1555년(명종 10) 15세 때 어머니 평산 신씨가 세상을 떠나자, 두 형 이섭(李涉)과 이용(李溶)을 따라서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며 3년 상을 마쳤다. 1558년(명종 13) 18세 때 청주목사(淸州牧使)이증영(李增榮)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인 이증영은 명종의 잠저(潛邸) 때 사부(師傅)였을 만큼 학문에 뛰어났으므로, 이광은 장인 이증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 아버지 이원상(李元祥)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570년(선조 3) 음직으로 선릉(宣陵) 참봉(參奉)이 되었고,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였다. 그때 대책(對策)에서 1등을 차지한 책문(策文)이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범 답안으로 통하였다.&lt;br /&gt;
&lt;br /&gt;
그는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매우 능숙하였다. 송사와 관련된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아전 몇 명으로 하여금 양쪽에서 붓을 잡게 하고, 귀로 보고를 듣고 입으로 판결하면서 신속하게 결재하였는데도, 어느 것 하나라도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무(兵務)와 재정에 관한 일을 처리를 하는 경우에도 번거롭게 하거나 수고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그러나 집안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평소 집안에 식량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살 때에도 모두 자기 집이 없었고, 집안의 기물(器物)도 귀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lt;br /&gt;
&lt;br /&gt;
그는 함경도관찰사를 4년 동안 연임하면서 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청렴함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임기를 마치고 영흥(永興)을 떠날 때, 몸에 지닌 것이라고는 오직 책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그때가 마침 한 겨울이어서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관아의 창고에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녹비(鹿皮) 수백 장이 있었으므로, 영흥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가도록 간청하였다. 그들이 하도 강권(强勸)하는 바람에 이광은 녹비 한 장을 받아 가지고 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길주(吉州)에 들렀는데, 떠날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영흥에서 가져온 녹피 한 장을 관아의 창고에 슬그머니 넣어 두고 길을 떠났다.&lt;br /&gt;
&lt;br /&gt;
당시 함흥(咸興)의 감영에서는 예전부터 세포(細布)와 초피(貂皮 : 담비 가죽)를 납부하도록 하여 함경도관찰사가 사사로운 용도로 쓰면서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후백(李後白)과 정언신(鄭彦信)이 잇따라 함경도관찰사가 되면서 그 숫자를 반으로 줄였으나, 이광 또한 관찰사로 부임한 후 이것을 모조리 견감(蠲減)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lt;br /&gt;
&lt;br /&gt;
그는 관청에서 업무를 볼 때,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으로 일관하였다. 친척이나 옛 친구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선물을 보내오면 일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함경도에 근무할 던 어느 날 아들에게 문서를 점검해 보라고 하였다. 아들은 아직 뜯지도 않은 채 쌓여있는 집에서 온 문안 서찰 수십 통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바쳤는데, 이광은 웃으면서 “이것은 평안하다는 소식을 전해 온 서찰일 것이다. 나는 겉봉만 보고도 벌써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글을 지을 때 내용의 흐름에 중점을 두었고, 글을 아름답게 다듬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가할 때에는 붓이 가는 대로 시를 지어서 읊었는데, 가필(加筆)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자손들이 흩어진 원고를 모아 문집 『우계집(雨溪集)』을 편찬하여 간행하였다. 시인권필(權韠) 등의 문인들이 그 글을 보고 탄복하기를, “이는 명가(名家)도 따라 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lt;br /&gt;
&lt;br /&gt;
=='''묘소와 후손'''==&lt;br /&gt;
&lt;br /&gt;
묘소는 충청도 면천군(沔川郡) 창택리(滄澤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이식(李植)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지금 무덤은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에 있다. 증조할아버지 이의무 이후 3대가 모두 면천군 창택리에 안장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자손들이 대부분 이곳에 장지(葬地)를 잡게 되었으므로, 이광의 자손들은 전라도 고부군 우일향에서 충청도 면천의 선영(先塋)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그는 세상을 뜬 지 26년이 지난 1633년(인조 11) 신원(伸寃)되었으며, 관작(官爵) 또한 회복되었다.&lt;br /&gt;
&lt;br /&gt;
부인 덕산 이씨(德山李氏)는 청주목사(淸州牧使)이증영(李增榮)의 딸인데,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안지(李安止)는 일찍 죽었고, 차남 이안직(李安直)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냈으며, 3남 이안진(李安眞)은 직언(直言)으로 선발되어, 영덕현령(盈德縣令)을 지냈다. 외동딸은 현감(縣監)남철(南澈)에게 출가하였는데,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손자 이위(李椲)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등을 지냈다.&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선조실록(宣祖實錄)』      &lt;br /&gt;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lt;br /&gt;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lt;br /&gt;
*『국조방목(國朝榜目)』      &lt;br /&gt;
*『택당집(澤堂集)』      &lt;br /&gt;
*『기재사초(寄齋史草)』      &lt;br /&gt;
*『간이집(簡易集)』      &lt;br /&gt;
*『갈암집(葛庵集)』      &lt;br /&gt;
*『난중잡록(亂中雜錄)』      &lt;br /&gt;
*『문소만록(聞韶漫錄)』      &lt;br /&gt;
*『백사집(白沙集)』      &lt;br /&gt;
*『용재집(容齋集)』      &lt;br /&gt;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lt;br /&gt;
*『심리록(審理錄)』      &lt;br /&gt;
*『서애집(西厓集)』      &lt;br /&gt;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lt;br /&gt;
*『청음집(淸陰集)』      &lt;br /&gt;
*『국조보감(國朝寶鑑)』      &lt;br /&gt;
*『갑진만록(甲辰漫錄)』      &lt;br /&gt;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lt;br /&gt;
*『송자대전(宋子大全)』      &lt;br /&gt;
*『홍재전서(弘齋全書)』      &lt;br /&gt;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lt;br /&gt;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lt;br /&gt;
*『우계집(雨溪集)』      &lt;br /&gt;
&lt;br /&gt;
[[분류:인물]][[분류:문신]][[분류:한국]][[분류:조선]][[분류:선조]]&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D%99%A9%EC%A4%80%ED%97%8C(%E9%BB%83%E9%81%B5%E6%86%B2)&amp;diff=15849</id>
		<title>황준헌(黃遵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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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0-08-13T14:20:0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Tutor: Tutor님이 황준헌 문서를 넘겨주기를 만들지 않고 황준헌(黃遵憲) 문서로 이동했습니다: 한자병기&lt;/p&gt;
&lt;hr /&gt;
&lt;div&gt;{{인물|대표표제=황준헌|한글표제=황준헌|한자표제=黃遵憲|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강유위(康有爲), 김홍집(金弘集), 변법운동(變法運動),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 『일본국지(日本國誌)』, 『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분야=정치/외교/외교사안|유형=인물|지역=중국/대한민국|시대=청/조선|왕대=청/조선|집필자=김소영|이칭=자: 공도(公度), 호: 인경려주인(人境廬主人), 별호: 동해공(東海公), 포대화상(布袋和尙)|성별=남|생년=1848년 5월 29일|몰년=1905년 3월 28일|본관=|출신지=       광동(廣東) 가응(嘉應) |관력=주일청국공사 참찬관,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싱가폴 주재 총영사, 주일청국공사|가족관계=|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681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09008_001 『고종실록』 17년 9월 8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10003_001 『고종실록』 17년 10월 3일]}}&lt;br /&gt;
&lt;br /&gt;
청말 외교 관료이자 사상가로 활동한 인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으로 활동하며 조선 정부가 취해야 할 외교 전략을 담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저술하여,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에게 전하였다. 18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1891년 싱가폴 주재 총영사 등 외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쌓은 견문을 바탕으로 『일본국지(日本國誌)』와 같은 저서를 저술하였다. 황준헌의 저술과 사상은 강유위·양계초 등 변법개혁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역시 활발한 개혁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활동 사항'''==&lt;br /&gt;
&lt;br /&gt;
황준헌은 1876년(광서 2) 거인(擧人)이 되었고 1877년 초대 주일청국공사하여장(何如璋)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참찬관으로 일본에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880년 제4차 수신사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갔을 때 공사하여장과 함께 그를 만나 국제 관계와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 전략을 논의하였다. 황준헌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조선의 외교 전략으로 친중(親中)·연미(聯美)·결일(結日)을 주장하고, 이러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사의조선책략』을 저술하여 김홍집에게 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09008_001 『고종실록』 17년 9월 8일]). 『조선책략』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조선의 척사파들이 크게 반발하여 황준헌과 그의 저서를 조선 내로 가져온 김홍집을 비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10003_001 『고종실록』 17년 10월 3일])[ 『고종실록』 18년 2월 26일 4번째기사].&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시에도 조약 초안을 작성하여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는 데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후 18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1890년 초 주영국공사 참찬(參贊)직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91년에는 싱가폴 주재 총영사에 임명되어 외교관으로서 계속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청일전쟁 이후 귀국하여 강유위를 비롯한 급진적인 신사, 관료층이 추진하고 있던 변법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개혁 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95년 9월부터 강유위와 만나 강학회(强學會)에 합류한 황준헌은 양계초 등과 상해(上海) 『시무보(時務報)』 발행을 주도하였다. 1896년 광서제는 황준헌을 서호남안찰사(署湖南按察使)에 임명하였다. 그는 개혁파였던 순무(巡撫)진보잠(陳寶箴) 휘하에서 담사동(譚嗣同)·당재상(唐才常) 등 호남의 신사, 관료들과 협력하여 시무학당(時務學堂)·남학회(南學會)·보위국(保衛局) 등을 설립하고, 『상보(湘報)』를 창간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해 갔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1898년 일본 공사에 임명되는 등 계속해서 광서제의 신임을 얻었으나 서태후에 의하여 무술정변이 일어나면서 파면되어 귀향하였다. 고향에 머무는 동안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향에 가응흥학회의소(嘉應興學會議所)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학문과 사상'''==&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 근대적 개혁의 성과 등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1879년 『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를 저술하고, 1887년에는 『일본국지(日本國誌)』를 저술하여 1895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두 저서를 통하여 일본의 역사와 문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화이론적 일본관·세계관을 탈피하였다. 그는 청국·일본·조선이 동일한 유교문화권이라는 인식하에 일본인이 제창한 아시아연대에 호응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시아연대론을 바탕으로 『사의조선책략』을 저술하여, 조선과 청국·일본·미국이 협력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강유위 등이 주도하였던 변법운동에 참여하면서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개혁을 참고로 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저술 및 작품'''==&lt;br /&gt;
&lt;br /&gt;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인경려시초(人境廬詩草)』·『일본국지(日本國志)』·『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황준헌, 『조선책략』, 범우사, 2013.      &lt;br /&gt;
*배경한,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아시아주의’」, 『동양사학연구』 127, 2014.      &lt;br /&gt;
*조병한, 「청말 중국의 변혁사조와 근대 일본 인식」, 『사학연구』 88, 2007.      &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중국/대한민국]][[분류:청/조선]][[분류:청/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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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황준헌(黃遵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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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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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청말 외교 관료이자 사상가로 활동한 인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으로 활동하며 조선 정부가 취해야 할 외교 전략을 담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저술하여,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에게 전하였다. 18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1891년 싱가폴 주재 총영사 등 외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쌓은 견문을 바탕으로 『일본국지(日本國誌)』와 같은 저서를 저술하였다. 황준헌의 저술과 사상은 강유위·양계초 등 변법개혁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역시 활발한 개혁활동을 펼쳤다.&lt;br /&gt;
&lt;br /&gt;
=='''활동 사항'''==&lt;br /&gt;
&lt;br /&gt;
황준헌은 1876년(광서 2) 거인(擧人)이 되었고 1877년 초대 주일청국공사하여장(何如璋)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참찬관으로 일본에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880년 제4차 수신사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갔을 때 공사하여장과 함께 그를 만나 국제 관계와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 전략을 논의하였다. 황준헌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조선의 외교 전략으로 친중(親中)·연미(聯美)·결일(結日)을 주장하고, 이러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 『사의조선책략』을 저술하여 김홍집에게 전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09008_001 『고종실록』 17년 9월 8일]). 『조선책략』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조선의 척사파들이 크게 반발하여 황준헌과 그의 저서를 조선 내로 가져온 김홍집을 비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1710003_001 『고종실록』 17년 10월 3일])[ 『고종실록』 18년 2월 26일 4번째기사].&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체결 시에도 조약 초안을 작성하여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는 데 참고하도록 하였다. 이후 188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재 총영사, 1890년 초 주영국공사 참찬(參贊)직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891년에는 싱가폴 주재 총영사에 임명되어 외교관으로서 계속 활동하였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청일전쟁 이후 귀국하여 강유위를 비롯한 급진적인 신사, 관료층이 추진하고 있던 변법운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개혁 사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95년 9월부터 강유위와 만나 강학회(强學會)에 합류한 황준헌은 양계초 등과 상해(上海) 『시무보(時務報)』 발행을 주도하였다. 1896년 광서제는 황준헌을 서호남안찰사(署湖南按察使)에 임명하였다. 그는 개혁파였던 순무(巡撫)진보잠(陳寶箴) 휘하에서 담사동(譚嗣同)·당재상(唐才常) 등 호남의 신사, 관료들과 협력하여 시무학당(時務學堂)·남학회(南學會)·보위국(保衛局) 등을 설립하고, 『상보(湘報)』를 창간하는 등 개혁정책을 추진해 갔다.&lt;br /&gt;
&lt;br /&gt;
황준헌은 1898년 일본 공사에 임명되는 등 계속해서 광서제의 신임을 얻었으나 서태후에 의하여 무술정변이 일어나면서 파면되어 귀향하였다. 고향에 머무는 동안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와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향에 가응흥학회의소(嘉應興學會議所)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lt;br /&gt;
&lt;br /&gt;
=='''학문과 사상'''==&lt;br /&gt;
&lt;br /&gt;
황준헌은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 근대적 개혁의 성과 등을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1879년 『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를 저술하고, 1887년에는 『일본국지(日本國誌)』를 저술하여 1895년 간행하였다. 그는 이 두 저서를 통하여 일본의 역사와 문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화이론적 일본관·세계관을 탈피하였다. 그는 청국·일본·조선이 동일한 유교문화권이라는 인식하에 일본인이 제창한 아시아연대에 호응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아시아연대론을 바탕으로 『사의조선책략』을 저술하여, 조선과 청국·일본·미국이 협력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강유위 등이 주도하였던 변법운동에 참여하면서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개혁을 참고로 한 자신의 개혁 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lt;br /&gt;
&lt;br /&gt;
=='''저술 및 작품'''==&lt;br /&gt;
&lt;br /&gt;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인경려시초(人境廬詩草)』·『일본국지(日本國志)』·『일본잡사시(日本雜事詩)』&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황준헌, 『조선책략』, 범우사, 2013.      &lt;br /&gt;
*배경한,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아시아주의’」, 『동양사학연구』 127, 2014.      &lt;br /&gt;
*조병한, 「청말 중국의 변혁사조와 근대 일본 인식」, 『사학연구』 88, 2007.      &lt;br /&gt;
&lt;br /&gt;
[[분류:정치]][[분류:외교]][[분류:외교사안]][[분류:인물]][[분류:중국/대한민국]][[분류:청/조선]][[분류:청/조선]]&lt;/div&gt;</summary>
		<author><name>Tutor</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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