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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illokwiki - 사용자 기여 [ko]</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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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5-24T21:24:59Z</updated>
		<subtitle>사용자 기여</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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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성행궁(華城行宮)</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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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1-04T04:45:58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건축능원묘|대표표제=화성행궁|한글표제=화성행궁|한자표제=華城行宮|대역어=|상위어=행궁(行宮)|하위어=|동의어=|관련어=과천행궁(果川行宮), 능행(陵幸), 사도세자(思悼世子), 수은묘(垂恩墓),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산행궁(安山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영우원(永祐園), 원행(園行), 현륭원(顯隆園), 화령전(華寧殿), 화성(華城)|분야=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유형=건축·능·원·묘|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정조|집필자=조옥연|건립시기일시=1789(정조19)~1796(정조20)|장소=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규모=총 620여 칸(부속건물 포함)|양식=|관련인물=장헌세자(莊獻世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정조|실록사전URL=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3-CKD-1240001&amp;amp;callType=srch&amp;amp;dataID=AKS-2013-CKD-1240001_DIC@0000914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lt;br /&gt;
&lt;br /&gt;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배봉산에서 수원부 화성으로 옮기고 조성한 행궁.&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1.PNG|섬네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는 양주 땅 남쪽 배봉산 자락에 수은묘(垂恩墓)라는 이름으로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그 후에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을 벗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위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만들려는 대규모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화성(華城) 축조이다. 정조는 “성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덕으로 성을 보존한다.” 하는 기본 개념으로 화성 축조를 수행했다.&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축성은 “상업의 발전을 위해 전통적인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벗어나 산천의 형세, 논밭과 사람들의 삶, 관방(關防)과 성지, 도로의 이점 등을 고루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뜻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건설 계획, 수원부사(水原府使)조심태(趙心泰)의 충성스러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지휘·감독이 어우러져 이룩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7월 정조는 수원의 옛 마을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주비를 보상하고 팔달산 아래 수원의 새 마을로 옮겨 가도록 하였다. 백성들이 옮겨 간 자리에 우선 아버지의 능침을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 1789년 10월, 완성된 현륭원의 참배를 마친 정조는 팔달산 위에 올라가 백성들이 이주한 산 아래 마을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계획된 신도시와 새로운 성곽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현륭원의 조성과 함께 마련된 화성행궁에 더해 궁실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행궁의 역사(役事)를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위치 및 용도'''==&lt;br /&gt;
&lt;br /&gt;
행궁은 왕이 도성 안 궁궐을 떠나 행차의 중간 또는 목적지에 다다라 머무는 지방의 궁실이다. 궁궐을 떠나는 왕의 행차는 피병을 위한 것이거나 선대왕들을 참배하기 위한 능행,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행궁은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의 행궁, 북한산성의 행궁, 온양행궁 등이 있다. 화성행궁은 과천행궁, 안양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과 더불어 표면적인 역할은 현륭원의 참배를 위한 능행용 행궁이었다. 건물의 건축적 형태는 소박하였지만 장대한 규모와 잘 짜인 배치 계획은 자신의 훗날을 함께할 작은 궁궐을 꿈꾸며 조성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수원의 새 마을은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다. 팔달산은 도시의 전체 구도에서 보아 서쪽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동쪽은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도심을 흐르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 준설 작업을 하고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십자형 도로를 만들었다. 팔달산의 동쪽 기슭에서 시작되는 화성행궁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나 남·북문을 관통하는 도로, 그리고 동문에서 행궁까지 이어지는 동·서 간선 도로를 두었다.&lt;br /&gt;
&lt;br /&gt;
=='''변천 및 현황'''==&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가을, 현륭원의 완성과 함께 수원부를 다스릴 관청이 들어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 27칸 규모의 장남헌(張南軒), 객사와 동헌인 은약헌(隱若軒)과 수령의 가족이 거처할 내아(內衙)가 만들어졌다. 1792년(정조 16) 화성 축성이 결정되면서 행궁의 증축도 함께 결정 났다. 당시 31세로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자리에 있던 정약용은 수원성의 축성 계획을 명령 받았고 이듬해 봄, 「성설(城說)」이라는 제목의 이상적 성곽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안이 그대로 채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명령이 되어 수원성 축성의 기본 지침으로 쓰였다. 수원성은 조선시대 어느 성곽보다 치밀하고, 색다른 방어 체제를 갖춘 시설물이었다. 계획에서 축성까지 이전과는 다른 체계로 18세기 말 건축의 진수가 되어 건설되었고, 이러한 수원성 안에는 그에 걸맞은 화성행궁이 성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기존의 행궁 건물이던 장남헌, 은약헌 등 총 규모 360여 칸의 행궁 건물에 더해 조성된 총 620여 칸 규모의 관청과 행궁이다. 화성 성역은 1794년(정조 18) 1월 착공하여 1796년(정조 20) 9월에 완공을 보아 총 34개월이 걸렸다. 공사 중 공사비가 부족해 공사가 중단되었던 기간을 계산하면 2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 거대하고 완벽한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을 완공한 후 정조는 가장 먼저 기존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다. 행궁의 정당이었던 장남헌이 ‘봉수당(奉壽堂)’으로 바뀌었다.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시어소(時御所)인 ‘장락당(長樂堂)’은 봉수당과 연결되어 놓이게 되었던 만큼 생모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살피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정조 승하 후, 혜경궁 홍씨는 더 이상 이곳 장락당에 머물 일이 없었다.&lt;br /&gt;
&lt;br /&gt;
1911년 봉수당 건물을 중심으로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1925년 봉수당을 헐고 2층 벽돌 건물인 경기도립수원의원이 설립되었다. 1935년부터 병원이 확장을 거듭하며 낙남헌(落南軒)을 제외한 행궁의 모든 건물이 사라졌다. 1996년 7월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2002년 7월 완공,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형태'''==&lt;br /&gt;
&lt;br /&gt;
신풍루(新豐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누문(樓門)이다. 이 좌우에 남·북 군영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북쪽에 집사청, 남쪽에 서리청과 비장청·외정리소가 차례로 놓여 있다. 신풍루 다음의 중문이 좌익문인데, 좌익문을 기점으로 행각이 ‘口’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좌익문에서 중양문까지 넓은 행각 마당이 펼쳐지고 중양문을 들어서면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있다. 마당에 왕의 공간임을 나타내는 어도를 깔아 봉수당 영역의 위상을 높였고 서남쪽 모서리, 즉 건물의 후면 오른쪽에 잇대어 장락당을 배치했다. 장락당에서 행각으로 연결된 복내당(福內堂)이 남쪽에 위치해 있다. 봉수당의 좌측, 즉 북쪽으로 북향한 득중정(得中亭)과 연이어 ‘ㄱ’자로 꺾어진 건물인 노래당(老來堂), 낙남헌이 각각 동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다. 북향한 낙남헌은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전면이 군사들이 강무하던 터와 연결되어 있다. 낙남헌의 동쪽이자, 행궁 전체 배치에서 좌측인 북쪽에 치우쳐 넓은 마당과 우화관(于華館)을 배치해 두었는데 객사 건물이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꾸몄지만 짜임새 있는 구조로 조선의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고 쓰임과 배려를 건물 형태에 부여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2.PNG|섬네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홍재전서(弘齋全書)』      &lt;br /&gt;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lt;br /&gt;
*김동욱,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9143&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왕실]][[분류:왕실건축]][[분류:궁궐건축물]][[분류:건축·능·원·묘]][[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분류:정조]]&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D%99%94%EC%84%B1%ED%96%89%EA%B6%81(%E8%8F%AF%E5%9F%8E%E8%A1%8C%E5%AE%AE)&amp;diff=15876</id>
		<title>화성행궁(華城行宮)</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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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1-01T01:19:57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강혜원 (토론)의 15875판 편집을 되돌림&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건축능원묘|대표표제=화성행궁|한글표제=화성행궁|한자표제=華城行宮|대역어=|상위어=행궁(行宮)|하위어=|동의어=|관련어=과천행궁(果川行宮), 능행(陵幸), 사도세자(思悼世子), 수은묘(垂恩墓),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산행궁(安山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영우원(永祐園), 원행(園行), 현륭원(顯隆園), 화령전(華寧殿), 화성(華城)|분야=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유형=건축·능·원·묘|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정조|집필자=조옥연|건립시기일시=1789(정조19)~1796(정조20)|장소=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규모=총 620여 칸(부속건물 포함)|양식=|관련인물=장헌세자(莊獻世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정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14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lt;br /&gt;
&lt;br /&gt;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배봉산에서 수원부 화성으로 옮기고 조성한 행궁.&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1.PNG|섬네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는 양주 땅 남쪽 배봉산 자락에 수은묘(垂恩墓)라는 이름으로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그 후에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을 벗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위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만들려는 대규모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화성(華城) 축조이다. 정조는 “성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덕으로 성을 보존한다.” 하는 기본 개념으로 화성 축조를 수행했다.&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축성은 “상업의 발전을 위해 전통적인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벗어나 산천의 형세, 논밭과 사람들의 삶, 관방(關防)과 성지, 도로의 이점 등을 고루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뜻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건설 계획, 수원부사(水原府使)조심태(趙心泰)의 충성스러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지휘·감독이 어우러져 이룩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7월 정조는 수원의 옛 마을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주비를 보상하고 팔달산 아래 수원의 새 마을로 옮겨 가도록 하였다. 백성들이 옮겨 간 자리에 우선 아버지의 능침을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 1789년 10월, 완성된 현륭원의 참배를 마친 정조는 팔달산 위에 올라가 백성들이 이주한 산 아래 마을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계획된 신도시와 새로운 성곽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현륭원의 조성과 함께 마련된 화성행궁에 더해 궁실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행궁의 역사(役事)를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위치 및 용도'''==&lt;br /&gt;
&lt;br /&gt;
행궁은 왕이 도성 안 궁궐을 떠나 행차의 중간 또는 목적지에 다다라 머무는 지방의 궁실이다. 궁궐을 떠나는 왕의 행차는 피병을 위한 것이거나 선대왕들을 참배하기 위한 능행,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행궁은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의 행궁, 북한산성의 행궁, 온양행궁 등이 있다. 화성행궁은 과천행궁, 안양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과 더불어 표면적인 역할은 현륭원의 참배를 위한 능행용 행궁이었다. 건물의 건축적 형태는 소박하였지만 장대한 규모와 잘 짜인 배치 계획은 자신의 훗날을 함께할 작은 궁궐을 꿈꾸며 조성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수원의 새 마을은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다. 팔달산은 도시의 전체 구도에서 보아 서쪽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동쪽은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도심을 흐르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 준설 작업을 하고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십자형 도로를 만들었다. 팔달산의 동쪽 기슭에서 시작되는 화성행궁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나 남·북문을 관통하는 도로, 그리고 동문에서 행궁까지 이어지는 동·서 간선 도로를 두었다.&lt;br /&gt;
&lt;br /&gt;
=='''변천 및 현황'''==&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가을, 현륭원의 완성과 함께 수원부를 다스릴 관청이 들어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 27칸 규모의 장남헌(張南軒), 객사와 동헌인 은약헌(隱若軒)과 수령의 가족이 거처할 내아(內衙)가 만들어졌다. 1792년(정조 16) 화성 축성이 결정되면서 행궁의 증축도 함께 결정 났다. 당시 31세로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자리에 있던 정약용은 수원성의 축성 계획을 명령 받았고 이듬해 봄, 「성설(城說)」이라는 제목의 이상적 성곽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안이 그대로 채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명령이 되어 수원성 축성의 기본 지침으로 쓰였다. 수원성은 조선시대 어느 성곽보다 치밀하고, 색다른 방어 체제를 갖춘 시설물이었다. 계획에서 축성까지 이전과는 다른 체계로 18세기 말 건축의 진수가 되어 건설되었고, 이러한 수원성 안에는 그에 걸맞은 화성행궁이 성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기존의 행궁 건물이던 장남헌, 은약헌 등 총 규모 360여 칸의 행궁 건물에 더해 조성된 총 620여 칸 규모의 관청과 행궁이다. 화성 성역은 1794년(정조 18) 1월 착공하여 1796년(정조 20) 9월에 완공을 보아 총 34개월이 걸렸다. 공사 중 공사비가 부족해 공사가 중단되었던 기간을 계산하면 2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 거대하고 완벽한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을 완공한 후 정조는 가장 먼저 기존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다. 행궁의 정당이었던 장남헌이 ‘봉수당(奉壽堂)’으로 바뀌었다.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시어소(時御所)인 ‘장락당(長樂堂)’은 봉수당과 연결되어 놓이게 되었던 만큼 생모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살피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정조 승하 후, 혜경궁 홍씨는 더 이상 이곳 장락당에 머물 일이 없었다.&lt;br /&gt;
&lt;br /&gt;
1911년 봉수당 건물을 중심으로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1925년 봉수당을 헐고 2층 벽돌 건물인 경기도립수원의원이 설립되었다. 1935년부터 병원이 확장을 거듭하며 낙남헌(落南軒)을 제외한 행궁의 모든 건물이 사라졌다. 1996년 7월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2002년 7월 완공,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형태'''==&lt;br /&gt;
&lt;br /&gt;
신풍루(新豐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누문(樓門)이다. 이 좌우에 남·북 군영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북쪽에 집사청, 남쪽에 서리청과 비장청·외정리소가 차례로 놓여 있다. 신풍루 다음의 중문이 좌익문인데, 좌익문을 기점으로 행각이 ‘口’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좌익문에서 중양문까지 넓은 행각 마당이 펼쳐지고 중양문을 들어서면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있다. 마당에 왕의 공간임을 나타내는 어도를 깔아 봉수당 영역의 위상을 높였고 서남쪽 모서리, 즉 건물의 후면 오른쪽에 잇대어 장락당을 배치했다. 장락당에서 행각으로 연결된 복내당(福內堂)이 남쪽에 위치해 있다. 봉수당의 좌측, 즉 북쪽으로 북향한 득중정(得中亭)과 연이어 ‘ㄱ’자로 꺾어진 건물인 노래당(老來堂), 낙남헌이 각각 동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다. 북향한 낙남헌은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전면이 군사들이 강무하던 터와 연결되어 있다. 낙남헌의 동쪽이자, 행궁 전체 배치에서 좌측인 북쪽에 치우쳐 넓은 마당과 우화관(于華館)을 배치해 두었는데 객사 건물이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꾸몄지만 짜임새 있는 구조로 조선의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고 쓰임과 배려를 건물 형태에 부여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2.PNG|섬네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홍재전서(弘齋全書)』      &lt;br /&gt;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lt;br /&gt;
*김동욱,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9143&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왕실]][[분류:왕실건축]][[분류:궁궐건축물]][[분류:건축·능·원·묘]][[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분류:정조]]&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D%99%94%EC%84%B1%ED%96%89%EA%B6%81(%E8%8F%AF%E5%9F%8E%E8%A1%8C%E5%AE%AE)&amp;diff=15875</id>
		<title>화성행궁(華城行宮)</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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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1-01T01:18:41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 관계망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건축능원묘|대표표제=화성행궁|한글표제=화성행궁|한자표제=華城行宮|대역어=|상위어=행궁(行宮)|하위어=|동의어=|관련어=과천행궁(果川行宮), 능행(陵幸), 사도세자(思悼世子), 수은묘(垂恩墓),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산행궁(安山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영우원(永祐園), 원행(園行), 현륭원(顯隆園), 화령전(華寧殿), 화성(華城)|분야=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유형=건축·능·원·묘|지역=대한민국|시대=조선|왕대=정조|집필자=조옥연|건립시기일시=1789(정조19)~1796(정조20)|장소=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규모=총 620여 칸(부속건물 포함)|양식=|관련인물=장헌세자(莊獻世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정조|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09143|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lt;br /&gt;
&lt;br /&gt;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배봉산에서 수원부 화성으로 옮기고 조성한 행궁.&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1.PNG|섬네일]]&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는 양주 땅 남쪽 배봉산 자락에 수은묘(垂恩墓)라는 이름으로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12_004 『정조실록』 즉위년 3월 12일]). 정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야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3020_001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그 후에도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을 벗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위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만들려는 대규모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화성(華城) 축조이다. 정조는 “성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덕으로 성을 보존한다.” 하는 기본 개념으로 화성 축조를 수행했다.&lt;br /&gt;
&lt;br /&gt;
정조의 화성 축성은 “상업의 발전을 위해 전통적인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벗어나 산천의 형세, 논밭과 사람들의 삶, 관방(關防)과 성지, 도로의 이점 등을 고루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뜻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건설 계획, 수원부사(水原府使)조심태(趙心泰)의 충성스러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지휘·감독이 어우러져 이룩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7월 정조는 수원의 옛 마을에 살던 사람들에게 이주비를 보상하고 팔달산 아래 수원의 새 마을로 옮겨 가도록 하였다. 백성들이 옮겨 간 자리에 우선 아버지의 능침을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하였다. 1789년 10월, 완성된 현륭원의 참배를 마친 정조는 팔달산 위에 올라가 백성들이 이주한 산 아래 마을을 돌아보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계획된 신도시와 새로운 성곽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현륭원의 조성과 함께 마련된 화성행궁에 더해 궁실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행궁의 역사(役事)를 시작했다.&lt;br /&gt;
&lt;br /&gt;
=='''위치 및 용도'''==&lt;br /&gt;
&lt;br /&gt;
행궁은 왕이 도성 안 궁궐을 떠나 행차의 중간 또는 목적지에 다다라 머무는 지방의 궁실이다. 궁궐을 떠나는 왕의 행차는 피병을 위한 것이거나 선대왕들을 참배하기 위한 능행, 또는 군사적 목적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행궁은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의 행궁, 북한산성의 행궁, 온양행궁 등이 있다. 화성행궁은 과천행궁, 안양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과 더불어 표면적인 역할은 현륭원의 참배를 위한 능행용 행궁이었다. 건물의 건축적 형태는 소박하였지만 장대한 규모와 잘 짜인 배치 계획은 자신의 훗날을 함께할 작은 궁궐을 꿈꾸며 조성한 것이었다.&lt;br /&gt;
&lt;br /&gt;
수원의 새 마을은 팔달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다. 팔달산은 도시의 전체 구도에서 보아 서쪽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동쪽은 낮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다. 도심을 흐르는 물길을 만들기 위해 준설 작업을 하고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십자형 도로를 만들었다. 팔달산의 동쪽 기슭에서 시작되는 화성행궁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나 남·북문을 관통하는 도로, 그리고 동문에서 행궁까지 이어지는 동·서 간선 도로를 두었다.&lt;br /&gt;
&lt;br /&gt;
=='''변천 및 현황'''==&lt;br /&gt;
&lt;br /&gt;
1789년(정조 13) 가을, 현륭원의 완성과 함께 수원부를 다스릴 관청이 들어섰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310016_001 『정조실록』 13년 10월 16일]). 27칸 규모의 장남헌(張南軒), 객사와 동헌인 은약헌(隱若軒)과 수령의 가족이 거처할 내아(內衙)가 만들어졌다. 1792년(정조 16) 화성 축성이 결정되면서 행궁의 증축도 함께 결정 났다. 당시 31세로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자리에 있던 정약용은 수원성의 축성 계획을 명령 받았고 이듬해 봄, 「성설(城說)」이라는 제목의 이상적 성곽 계획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안이 그대로 채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명령이 되어 수원성 축성의 기본 지침으로 쓰였다. 수원성은 조선시대 어느 성곽보다 치밀하고, 색다른 방어 체제를 갖춘 시설물이었다. 계획에서 축성까지 이전과는 다른 체계로 18세기 말 건축의 진수가 되어 건설되었고, 이러한 수원성 안에는 그에 걸맞은 화성행궁이 성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 기존의 행궁 건물이던 장남헌, 은약헌 등 총 규모 360여 칸의 행궁 건물에 더해 조성된 총 620여 칸 규모의 관청과 행궁이다. 화성 성역은 1794년(정조 18) 1월 착공하여 1796년(정조 20) 9월에 완공을 보아 총 34개월이 걸렸다. 공사 중 공사비가 부족해 공사가 중단되었던 기간을 계산하면 2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 거대하고 완벽한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을 완공한 후 정조는 가장 먼저 기존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다. 행궁의 정당이었던 장남헌이 ‘봉수당(奉壽堂)’으로 바뀌었다.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시어소(時御所)인 ‘장락당(長樂堂)’은 봉수당과 연결되어 놓이게 되었던 만큼 생모의 안녕을 기원하며 보살피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정조 승하 후, 혜경궁 홍씨는 더 이상 이곳 장락당에 머물 일이 없었다.&lt;br /&gt;
&lt;br /&gt;
1911년 봉수당 건물을 중심으로 자혜의원이 들어섰다. 1925년 봉수당을 헐고 2층 벽돌 건물인 경기도립수원의원이 설립되었다. 1935년부터 병원이 확장을 거듭하며 낙남헌(落南軒)을 제외한 행궁의 모든 건물이 사라졌다. 1996년 7월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2002년 7월 완공,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lt;br /&gt;
&lt;br /&gt;
=='''형태'''==&lt;br /&gt;
&lt;br /&gt;
신풍루(新豐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누문(樓門)이다. 이 좌우에 남·북 군영이 배치되어 있고 그 뒤로 북쪽에 집사청, 남쪽에 서리청과 비장청·외정리소가 차례로 놓여 있다. 신풍루 다음의 중문이 좌익문인데, 좌익문을 기점으로 행각이 ‘口’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좌익문에서 중양문까지 넓은 행각 마당이 펼쳐지고 중양문을 들어서면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이 있다. 마당에 왕의 공간임을 나타내는 어도를 깔아 봉수당 영역의 위상을 높였고 서남쪽 모서리, 즉 건물의 후면 오른쪽에 잇대어 장락당을 배치했다. 장락당에서 행각으로 연결된 복내당(福內堂)이 남쪽에 위치해 있다. 봉수당의 좌측, 즉 북쪽으로 북향한 득중정(得中亭)과 연이어 ‘ㄱ’자로 꺾어진 건물인 노래당(老來堂), 낙남헌이 각각 동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다. 북향한 낙남헌은 편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전면이 군사들이 강무하던 터와 연결되어 있다. 낙남헌의 동쪽이자, 행궁 전체 배치에서 좌측인 북쪽에 치우쳐 넓은 마당과 우화관(于華館)을 배치해 두었는데 객사 건물이다.&lt;br /&gt;
&lt;br /&gt;
화성행궁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게 꾸몄지만 짜임새 있는 구조로 조선의 행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고 쓰임과 배려를 건물 형태에 부여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lt;br /&gt;
&lt;br /&gt;
[[파일:P00009143_02.PNG|섬네일]]&lt;br /&gt;
&lt;br /&gt;
=='''참고문헌'''==      &lt;br /&gt;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lt;br /&gt;
*『일성록(日省錄)』      &lt;br /&gt;
*『만기요람(萬機要覽)』      &lt;br /&gt;
*『홍재전서(弘齋全書)』      &lt;br /&gt;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lt;br /&gt;
*김동욱, 『실학 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amp;lt;html&amp;gt;&amp;lt;script&amp;g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amp;lt;/script&amp;gt;&amp;lt;input type=&amp;quot;button&amp;quot; value=&amp;quot;Graph&amp;quot; onclick=&amp;quot;reload();&amp;quot;&amp;gt;&amp;lt;iframe width=&amp;quot;100%&amp;quot; height=&amp;quot;670px&amp;quot; src=&amp;quot;https://encysilloknetwork.aks.ac.kr/Content/index?id=na00009143&amp;quot; frameborder=&amp;quot;0&amp;quot; allowfullscreen&amp;gt;&amp;lt;/iframe&amp;gt;&amp;lt;/html&amp;gt;&lt;br /&gt;
&lt;br /&gt;
[[분류:왕실]][[분류:왕실건축]][[분류:궁궐건축물]][[분류:건축·능·원·묘]][[분류:대한민국]][[분류:조선]][[분류:정조]]&lt;/div&gt;</summary>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ntry>
		<id>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title=%EC%9E%90%EA%B8%B0%EC%86%8C(%E7%A3%81%E5%99%A8%E6%89%80)&amp;diff=15866</id>
		<title>자기소(磁器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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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1-02-04T07:16:29Z</updated>
		
		<summary type="html">&lt;p&gt;강혜원: &lt;/p&gt;
&lt;hr /&gt;
&lt;div&gt;&lt;br /&gt;
&lt;br /&gt;
{{개념용어|대표표제=자기소|한글표제=자기소|한자표제=磁器所|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사기소(沙器所)|관련어=도기소(陶器所)|분야=문화/예술/미술|유형=개념용어|지역=전국|시대=조선시대|왕대=조선시대|집필자=박정민|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8128|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7012_003 『성종실록』 19년 7월 12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11005_001 『세종실록』 1년 11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2016_001 『세종실록』 8년 2월 16일],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01016_004 『세조실록』 3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자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국가에 납부했던 행정단위.&lt;br /&gt;
&lt;br /&gt;
=='''개설'''==&lt;br /&gt;
&lt;br /&gt;
자기소(磁器所)는 자기(磁器)를 생산하던 소(所)이다. 소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종 수공업품이나 광산물·수산물·농산물 등을 생산하던 행정단위이다. 자기를 사기(沙器)로 부르는 것처럼 자기소 역시 사기소(沙器所)로 부르기도 했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자기소에서는 자기를 만들어 국가에 공납했다. 조선 15세기에는 전국에 139개의 자기소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자기소 이외에 전국 185곳에 도기를 생산하여 국가에 납부했던 도기소(陶器所)가 있었다.&lt;br /&gt;
&lt;br /&gt;
자기소는 조선시대 도자사(陶瓷史)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고학 조사를 통한 실증적인 접근이 가능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lt;br /&gt;
&lt;br /&gt;
=='''내용 및 특징'''==&lt;br /&gt;
&lt;br /&gt;
조선시대에 자기소는 자기를 생산하여 국가에 공납하던 곳이었다. 기록에는 자기소보다는 주로 사기소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재된 자기소는 전국에 139개소인데 경기도에 14곳, 충청도에 23곳, 경상도에 37곳, 전라도에 31곳, 강원도에 4곳, 황해도에 12곳, 평안도에 13곳, 함길도에 5곳이 있었다. 전국의 자기소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 그리고 무품(無品)으로 구분되었다. 139개의 자기소 중 상품으로 구분된 곳은 경상도 상주에 2곳, 고령에 1곳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 1곳 등 총 3지역 4곳에 불과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고령현].&lt;br /&gt;
&lt;br /&gt;
자기소는 모든 군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7012_003 『성종실록』 19년 7월 12일]). 조선전기에 운영된 가마들 중에는 자기소로 등재되지 않고 그릇을 생산한 가마도 많았다.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주로 그릇의 생산이 원활하고 만들어진 그릇을 도성으로 운송하기에 편리한 지역에 자리한 가마를 자기소로 등재했던 것으로 보인다.&lt;br /&gt;
&lt;br /&gt;
자기소는 주변에 자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과 땔감이 풍부하고 질 좋은 원료가 구비된 곳에 자리했다. 또한 가마와 작업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에 들어섰다. 강원도 횡성(橫城) 등지의 자기소는 이러한 입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개국 초기에는 왕이 사냥이나 강무(講武)를 나가서 머무는 숙소로도 활용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11005_001 『세종실록』 1년 11월 5일]),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2016_001 『세종실록』 8년 2월 16일]).&lt;br /&gt;
&lt;br /&gt;
소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종 수공업품이나 광산물·수산물·농산물 등을 생산하던 곳이다. 만들어진 제품이나 생산물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왕실과 관청으로 납부하였다. 소는 향(鄕)이나 부곡(部曲)과 달리 고려시대 이후에 공물(貢物)의 확보를 위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는 생산되는 제품과 원료에 따라 금소(金所), 은소(銀所), 자기소, 묵소(墨所), 탄소(炭所), 와소(瓦所), 염소(鹽所), 지소(紙所) 등으로 구분하였다.&lt;br /&gt;
&lt;br /&gt;
소는 군(郡)과 현(縣)의 관할에 속하는 보통 마을 중에 수공업품이나 광물 원료를 생산해낼 수 있는 지역을 위주로 국가에 의해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소는 주로 제품과 원료의 생산과 취득이 수월하고 공납품을 도성으로 운송하기에 편리한 곳에 자리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는 조운로(漕運路)를 이용하기 편리한 해안가나 강가에 자리하거나 중요한 도로 주변에 위치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01016_004 『세조실록』 3년 1월 16일]).&lt;br /&gt;
&lt;br /&gt;
조선전기에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의 군현에서 사용되는 수공업품과 광물 원료의 생산을 담당했던 소들은 조선의 군현제도와 공납 제도가 완비됨에 따라 해체되기 시작하여 점차 군현으로 흡수되거나 일반 촌락으로 변화되었다.&lt;br /&gt;
&lt;br /&gt;
=='''변천'''==&lt;br /&gt;
&lt;br /&gt;
고려시대의 자기소는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대구소(大口所)와 전라북도 부안(富安) 혹은 부안(扶安)의 자기소가 있었다. 그 밖에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일원에 자리했던 건자산소(巾子山所)도 자기소의 기능을 수행했던 곳으로 알려졌다.&lt;br /&gt;
&lt;br /&gt;
조선시대의 자기소는 주로 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의 139개 자기소와 185개 도기소가 등재되었다. 그러나 1530년(중종 25)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토산물조에는 전국의 자기소가 32개로 줄어들었으며 4개의 사기소를 별도로 기록했다. 자기소와 사기소를 합쳐도 15세기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lt;br /&gt;
&lt;br /&gt;
조선초기에 전국에 자리한 자기소를 통해 필요한 자기를 확보했던 조선 정부는 사옹원(司饔院)에서 필요한 자기를 얻었다. 사옹원은 1467년(세조 13)에 도성과 가장 가까운 상품 자기소였던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를 관요(官窯)로 삼아 운영했다. 그러나 사옹원 주도로 궁궐의 그릇을 제작한 이후에도 광주에 자리했던 관영 백자 제작처의 명칭은 그대로 사기소로 언급되었다.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가 관요로 운영된 이후에 전국의 자기소는 중앙에 납부할 그릇을 생산하는 대신 점차 각 지방의 수요에 부응하는 자기를 만들었다.&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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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lt;br /&gt;
*김영원,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lt;br /&gt;
*방병선,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 돌베개, 2002.      &lt;br /&gt;
*윤용이, 『韓國陶瓷史硏究』, 문예출판사, 1993.      &lt;br /&gt;
*이정신, 『고려시대의 특수행정구역 所 연구』, 혜안, 2013.      &lt;br /&gt;
&lt;br /&gt;
=='''관계망'''==&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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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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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name>강혜원</name></author>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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