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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鑽[河鎭兌]娚妹和會文記(1757)
개요 1757년 10월 28일에 河鑽[河鎭兌] 남매가 부모 사후에 그 재산을 나누어 가질 때 작성한 화회문기이다. 하찬은 하진태의 초명이다. 하재악의 자녀는 모두 1남 5녀인데, 당시에 참석한 사람 은 아들 하찬과 셋째 사위 韓墉이다.
乾隆二十二年丁丑十月二十八日娚妹和會成文
嗚呼! 我家喪禍連代疊出, 年纔以六歲, 奄失所怙, 孤危莫甚, 辭親離家, 生長他鄕.
今始入娶承家, 感愴莫逮之懷, 曷勝言哉! 窃念父主生時, 其未區處, 則娚妹和會文字, 不可不及時, 玆於眷歸之後,
相欲成文裁書, 偏通諸妹家, 而第一妹內外俱沒, 雖有一男一女, 男幼女嫁未參焉.
第二妹夫則以祀故答書而未參焉. 第四妹夫則以喪身未參焉. 第五妹夫則遠在千里, 且以喪身未參.
所與參同者, 本族諸人, 及第三妹夫韓墉也.
第惟在昔喪禍之餘, 連代祀位, 曾多放買, 故祖父主遺書於我先考, "使之竭力充補其賣數," 而袞我先考, 靑年謝世, 未及充補矣.
今當成文之日, 支孫諸人歸重, 祀位 四代元定數, 推尋先考衿得, 及買得畓充補, 連代祀位放賣減縮之數,
先考在世時, 又遵祖父主遺書, 田一石地及畓六斗地, 出給庶叔無后, 支庶衿付畓十一斗地田七斗地,
亦有付墓位之遺書, 而疊入於先考衿下, 諸孫亦爲推出, 依遺書付墓位,
吾里洞員·古毛洞·員介田員·假亭子員·馬山員·若木員, 合畓二十二斗地段, 只錄於田畓草記,
不書第坐卜數, 故未能推尋. 餘存畓十六斗五刀地, 田二石九斗地也.
父母主祀位, 從公論, 依法典, 定出; 其餘田畓, 六娚妹平均分衿; 奴婢段, 祖父主遺書中, 皆是
祀位, 後世子孫元不擧論云, 故父主在世時, 嫁送第一第二妹, 而皆未給新婢, 各以買婢價給之.
第三第四妹, 則母主亦, 以此規, 各給買婢價, 廣州妹, 則千里遠嫁, 無婢送去, 情理切迫,
故獨給買得婢以丹四所生婢遠德, 而買得婢所生五口內遠心一口,
則依諸妹或捧價或率婢之例, 從公論, 衿付於余, 其餘四口段, 亦以新祀位議定成文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