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골) 1713년 최수학·김동백 상송문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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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承俊(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sjann@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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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경주최씨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가문의 민원·소송문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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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訴訟社會’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인간 지역간 신분 계층 사이에 갈등이 滋甚했다. 조선시대 지방 守令의 하는 업무 가운데 약 5할 이상이 재판업무였을 정도였다. 고문서에 등장하는 소지(所志) 백활(白活)의송(議訟), 재판문서인 결송입안(決訟立案) 등급(謄給) 등이 이에 관한 문서이다. 이들 문서에는 전통시대 우리 민족의  국민성이 力動的이고 改革的인 성향과 함께 誇張性 便法性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연한 소송사건에서 상대방에 대한 자기중심적 주장을 ‘譸張(꾸미거나 속여서 주장함)’이라 표현했다. 이에 일제시기 일본 위정자들을 우리의 국민성이라고 誤解, 貶下하기도 했다. 대구 부인동 경주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17-19세기에 작성된 소지(所志) 원정(原情),입안(立案) 등 15,000 여점의 고문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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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일 (목) 20:31 판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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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年 崔壽學·金東白 相訟文書

                       安承俊(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sjann@aks.ac.kr)


▪ 대구 경주최씨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가문의 민원·소송문서에 대하여

한국의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訴訟社會’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인간 지역간 신분 계층 사이에 갈등이 滋甚했다. 조선시대 지방 守令의 하는 업무 가운데 약 5할 이상이 재판업무였을 정도였다. 고문서에 등장하는 소지(所志) 백활(白活)의송(議訟), 재판문서인 결송입안(決訟立案) 등급(謄給) 등이 이에 관한 문서이다. 이들 문서에는 전통시대 우리 민족의 국민성이 力動的이고 改革的인 성향과 함께 誇張性 便法性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연한 소송사건에서 상대방에 대한 자기중심적 주장을 ‘譸張(꾸미거나 속여서 주장함)’이라 표현했다. 이에 일제시기 일본 위정자들을 우리의 국민성이라고 誤解, 貶下하기도 했다. 대구 부인동 경주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17-19세기에 작성된 소지(所志) 원정(原情),입안(立案) 등 15,000 여점의 고문서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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