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골) 1713년 경상감사 장계 초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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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9일 (월) 10:44 기준 최신판
개요
- 강독교재 하권 227면/1713年 啟草拔尾
- 작성시기: 1713년
승정원일기 479책 (탈초본 25책) 숙종 39년 7월 21일 병인 25/62 기사 1713년 康熙(淸/聖祖) 52년
金鎭圭 등이 입시하여 崔壽學의 죄목과 처리에 대해 논의함
○ 前縣監崔壽學, 專事豪橫, 侵困小民罪。鎭圭曰, 罪人元情, 雖自發明, 而以狀啓觀之, 非但武斷鄕曲, 私門亂杖, 極爲駭異, 不可放釋矣。同義禁申銋曰, 武斷乃是重罪, 而慶尙監司, 不爲詳細究問, 狀啓請罪, 殊涉率爾矣。錫恒曰, 防水·養山等事, 則元情發明矣。上曰, 本律, 何如? 昌集曰, 本律, 似是全家徙邊矣。外方豪强之弊, 近來益甚, 隱匿良民於籬下, 使不得充定軍役, 此罪不可不嚴懲矣。宇杭曰, 豪强之類, 現發未易, 此則旣已發覺, 合有懲勵之道矣。上曰, 比本律, 參酌擬罪, 不限年定配, 可也。
- 작 성 자: 李坦(?~1729)[1] 승정원일기 483책 (탈초본 26책) 숙종 40년 4월 4일 을해 15/24 기사 1714년 康熙(淸/聖祖) 53년
李坦의 후임 差出에 承旨도 擬望하기를 청하는 吏批의 계
○ 又啓曰, 慶尙監司李坦瓜滿之代,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承旨竝擬, 何如? 傳曰, 允。
- 崔壽學과 金東白 분쟁건에 대한 경상감사의 장계를 초록한 문서
원문
탈초 및 정서 |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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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啓草拔尾 |
주석
- ↑ 李坦: ?∼ 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종실.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長男)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회(慶安君檜)이며, 아버지는 임창군 곤(臨昌君焜)이다. 소현세자가 일찍 죽자 세 아들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맏아들 경선군(慶善君)과 둘째 아들 경완군(慶完君)은 그곳에서 죽고, 경안군만이 혼자 살아 남았으므로 그는 소현세자의 혈손이기도 하다. 밀풍군(密豊君)에 봉하여졌다. 1723년(경종 3)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726년(영조 2) 다시 사은사 겸 동지사가 되어 다녀왔다. 1728년 소론파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훈련대장 남태징(南泰徵)과 그의 아우인 태적(泰績), 이정(李檉) 등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퍼지자, 난이 평정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남태징 등이 끝내 불복하였음에도 연루피의자들과 무더기로 참형되었고, 또한 소현세자의 현손이라는 신분이 풍문과 관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선원계보(璿源系譜)』 [네이버 지식백과] 이탄 [李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죽은 맏아들 崔麟錫(1677~1705) 외 차자 최정석(1678~1735, 1713년 당시 36세)과 말자 崔晉錫(1688~1727)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