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헌종 10) 헌종(1827-1849)과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의 혼인 축하 진하례의 모습을 그린 궁중 행사도.「헌종 가례진하도 병풍(憲宗嘉禮陳賀圖屛風)」은 1844년 헌종이 효정왕후와 혼인한 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거행된 진하례의 모습을 그린 궁중 행사도이다. 헌종은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가 죽자 이듬해 10월 18일 익풍부원군 홍재룡(洪在龍, 1794~1863)의 딸을 계비로 책봉하고 21일에 친영례를 치렀다. 헌종은 가례(嘉禮) 의식을 모두 마친 이튿날인 10월 22일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문무백관의 진하를 받았는데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바로 이 진하례 모습을 그린 것이다.「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8첩 병풍으로, 제1첩에는 ‘가례 후 진하교시시 반교문(嘉禮後陳賀敎是時頒敎文)’, 즉 진하례 때 반포된 교서가 쓰여 있다. 이 교서는 예문관 제학 조병구(趙秉龜, 1801~1845)가 지어서 올린 것임이 명시되어 있다. 제8첩에는 ‘선전관청 좌목(宣傳官廳座目)’이라 제목을 쓰고 절충장군(折衝將軍) 윤명검(尹明儉, 1779~?) 이하 선전관 25명의 성명과 인적 사항이 쓰여 있다. 이 좌목을 통해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선전관청의 관원들이 주축이 되어 제작한 기념화, 즉 계병(契屛)임을 알 수 있다. 반교문과 좌목을 제외한 나머지 6첩에는 진하례 광경이 인정전에 큰 비중을 두고 그려졌다. 인정전 좌·우의 건물은 이문원, 숙장문, 금천교, 금호문, 그리고 궐내 각사(闕內各司), 선정전, 희정당, 후원의 불로문 등 주요한 전각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인정전 대청에는 호위 의장과 승지·사관, 그리고 치사문을 낭독하는 뒷모습의 대치사관(代致詞官)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는 금관조복을 입은 문무백관이 열지어 앉아 있고 헌가(軒架) 악공과 노부 의장이 줄 맞추어 도열하였다. 인정전 안팎의 인물과 의물(儀物)의 배치를 통해 정전(正殿) 의식을 대표하는 진하례의 화려한 면모를 상세하게 엿볼 수 있다. 19세기에는 사실적인 궁궐의 모습을 재현한 궁궐도 제작이 발달함에 따라 국가의 경사스러운 의례를 마친 후에 관원들이 기념화를 주문할 때 진하도를 선호하였다. 진하도의 형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각 건물을 정면 부감의 시점에서 그린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같은 계열이 있고 사선 방향에서 부감하는 시점으로 그린 계열이 있다.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후자의 형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헌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 사료에 의하면, 실제 헌종 가례 후의 진하례는 경희궁 숭정전에서 거행된 것이 분명하지만 계병에는 사실과 달리 인정전 진하가 그려져 있다. 현전하는 19세기 진하도 병풍의 배경이 모두 인정전임을 감안하면, 관원들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정전인 인정전에서의 진하 장면을 선호하였으며 주문을 받은 화원들 사이에는 ‘인정전 진하’라는 정해진 도상의 밑그림이 준비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세기가 되면 궁중 행사도가 사실적인 기록화로서의 성격보다 기념화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여 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1982년과 2011년 보물로 지정된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본과 경기도박물관 소장본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1좌가 더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계병은 좌목에 이름이 오른 관원들의 숫자대로 제작하여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현재 같은 내용의 그림이 여러 벌 남아 있는 것은 한꺼번에 여러 벌을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던 계병 제작의 관행을 방증한다. 왕실 가례는 가장 중요한 국가 의례 중의 하나이며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은 이와 관련된 궁중 행사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19세기 인정전을 배경으로 한 진하도 병풍의 전형으로 삼을 만하며 그 중에서도 장대한 궁궐을 사선 부감 구도로 묘사한 계열의 진하도를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