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英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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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9월 19일 (일) 18: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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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ion

조선 제4대 국왕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를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인 헌릉(獻陵)의 서쪽 기슭에 영릉을 조성하면서 봉분 아래에 두 개의 석실을 만들고 그 중 동쪽에는 소헌왕후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나중에 세종이 승하하면 안치할 수 있도록,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해 두는 무덤인 수릉을 두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다시 옮기자는 의논에 따라 여주로 옮겼다. 1469년에 여주군으로 자리를 옮긴 영릉은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을 두지 않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릉(灰隔陵)으로 조성하였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능 아래 35보(步) 거리에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 서쪽 8보 지점에는 수라청(水刺廳)이, 동쪽 8보 지점에는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망료위(望燎位)는 정자각 서북쪽 15보 거리에 세워졌으며, 홍살문은 안향청(安香廳)에서 252보 거리에 건립되었다. 또한 오늘날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자리에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홍살문 남쪽에 하나, 재실 앞 동남쪽 13보 거리에 또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지의 규모는 길이 12보, 폭 11보이다. 안향청은 3칸이며, 재실은 6칸으로 전사청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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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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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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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주영릉(驪州英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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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두산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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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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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단행본 한국문원 편집실, (문화유산)왕릉 : 왕릉 기행으로 엮은 조선왕조사, (주)한국문원, 1995 국회전자도서관 https://dl.nanet.go.kr/MarcView.do?cn=MONO1199502972
단행본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글로세움, 2012 국회전자도서관 https://dl.nanet.go.kr/MarcView.do?cn=MONO1201202439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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