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철종 10) ~ 1907년】. 이준(李儁). 헤이그 특사. 본관은 전주.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해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1905년 5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항일 국민운동을 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1906년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이준은 고종을 만나 이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동의를 받았다.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정사 이상설,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헤이그에 도착하여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지만,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