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 1947년】. 여운형(呂運亨).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인. 본관 함양.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퇴.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무렵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상하이로 옮겨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에 관여하였고, 김규식(金奎植)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힘썼으며 1920년 김구와 함께 한인노병회(韓人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다가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11월에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과 김일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 문제 등을 논의하였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김규식·김창숙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쳤다. 1947년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 당해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