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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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슬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2월 8일 (수) 13:30 판 (Defin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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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1911】. 1856년(철종 7) 무과에 합격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개혁이 단행될 때 형조판서·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변이 실패하자 유배되었다. 1895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고, 춘생문사건에 가담하였으나 사건이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1896년 귀국한 뒤 전라남도 관찰사로 발령 받았고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수년에 걸쳐 중추원 의관을 맡았다. 1898년 내부협판·서리대신사무·귀족원경으로 발령 받았고, 법부협판으로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수년에 걸쳐 의정부 찬정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군부대신으로 발령 받았고, 이 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궁내부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1900년 전라남도 관찰사, 1902년 중추원의관·임시서리로 발령 받았다. 1903년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무·원수부 기록국 총장·군부대신·육군부장·원수부 검사국 총장 등에 임명되었다. 1904년 군부대신·임시서리 내장원경 사무·임시서리 농상공부 대신사무·참모부부장 등으로 발령 받았다.1905년 중추원 찬의·군부 찬모관에 임명되었고, 사립 강화육영학교와 국민교육회에 찬성금 100원씩을 기부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을 맡았고, 한성부에 있는 상업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정되었으며, 군대 해산으로 육군부장에서 해임되어 전역하였다. 1908년 3월 ‘대일본(제국)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 부장과 기호흥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보상금 중 3만원을 영국인 어니스트_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고서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국권 피탈 직후인 1910년 8월 말 본가에서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노비문권을 불태웠다. 1910년 10월 7일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1년 10월 사망하자 1912년 1월 15일 아들 윤치호가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1911년 105인_사건 주모자로 실형 선고된 것’을 사유로 1912년 5월 22일 남작의 예우가 정지되었고, 1913년 10월 9일 그 작위를 상실하였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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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 Actor 인물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윤웅렬 尹雄烈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윤웅렬

Contextual Relations

source target relation attribute note
윤웅렬 윤치호 hasSon 윤웅렬의 아들은 윤치호다.
윤웅렬 갑신정변 isRelatedTo 윤웅렬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윤웅렬 춘생문사건 isRelatedTo 윤웅렬은 춘생문사건에 가담했다.
윤웅렬 군부대신 servesAs 윤웅렬은 군부대신을 맡았다.
윤웅렬 경무사 servesAs 윤웅렬은 경무사를 맡아 한성부 치안을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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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윤웅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489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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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김영의, 『좌옹윤치호선생약전(佐翁尹致昊先生略傳)』, 기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 1934.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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