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1911】1855년 미야자키현[宮崎縣]에서 태어났다. 1871년 대학남교(大學南敎)에서 수학한 후 제1회 문부성 유학생으로 6년간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유학하였다. 귀국한 후 사법관을 거쳐 1884년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겨 번역국장, 청국 대리공사를 지냈다. 청·일전쟁 후 변리공사(辨理公使)로서 조선에 근무하며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하였다. 1896년 5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경우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공동으로 한다는 이른바 베베르-고무라 협정을 성립시켰다. 이어 외무차관, 미국·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뒤, 주청(駐淸) 공사가 되어 의화단운동 수습을 위한 국제회의에 일본의 전권대표로 참가하였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의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영·일(英日)동맹을 맺고 대(對)러시아 개전외교(開戰外交)를 추진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인 1905년 포츠머스회의에는 스스로 전권대사가 되어 강화를 성립시켰으나 강화조건에 불만을 가진 국민의 비난을 샀다. 귀국 후 일본이 남만주에 진출하는데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주영대사를 지낸 뒤 1908년 제2차 가쓰라 내각의 외무장관에 재임용되어 영·일동맹의 내용을 개정하고, 프랑스-일본협약과 러·일협상을 통하여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을 회복함으로써 불평등조약들을 완전 폐지시켰다. 고무라외교의 특징은 대륙에의 팽창정책에 있었으며, 1910년 한일합병을 추진하는데 있어서도 그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