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고종 9) ~ 1926년】. 이완용(李完用). 대한제국기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 을사5적, 경술9적,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우봉. 20세 때까지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고 25세때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3월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고 한국 최초 주미 공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890년 10월 귀국하여 대미외교의 1인자로 친미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5월 친미 친러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알렌의 후원 하에‘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신정치운동을 표방하는 데 앞장섰고, 고종의 환궁 운동을 전개하여 실현시켰다. 그런데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다.1905년 학부대신의 자리에 앉아 이토 히로부미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1907년 7월 내각총리대신으로 있으면서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의 강제양위를 주도하였다. 1910년 8월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 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월 22일 어전 회의에서 순종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냈다. 1910년 10월부터 조선총독부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등 일제의 식민정책에 협력하다가 1926년 사망하여 전북 익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