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3월 등극 직후 규장각의 건립을 명령한 뒤 그 의도를 "우리 선대왕의 운장(雲章)ㆍ보묵(寶墨)은 모두 다 소자를 가르쳐 주신 책이니, 존신 경근(尊信敬謹)하는 바가 어찌 보통 간찰(簡札)에 비할 것이겠는가?"라고 드러냈다. 이 건물은 3월에 시공하여 4월에 기초를 닦을 때까지만 해도 어제각(御製閣)이라 불렸다. 5월 상량할 때에 비로소 규장각이라고 불렸으며 건물은 7월에 준공되었고 9월 25일에 이르러 제학(提學)·직제학(直提學)·직각(直閣)·대교(待敎) 등의 관원을 두어 규장각은 비로소 정부의 공식 기구로 탄생하였다.
규장각 제도는 어제(御製)를 존각(尊閣)에 보존하는 송대의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 제도에서 연유하며 이는 이미 세조 조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건의된 바 있지만 시행되지는 못했다. 숙종조에는 종정시(宗正寺)에 소각(小閣)을 세우고 어서한 ‘규장각’세 글자를 게시(揭示)하였지만 규제(規制)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규장각은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였는데, 당저(當宁)의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寶冊)·인장(印章)을 봉안하였는데 그 편액(扁額)은 숙종의 어묵(御墨)을 썼으며, 또 주합루(宙合樓)의 편액을 남미(南楣)에 게시하였는데 곧 정조의 어묵이었다. 서남쪽에는 봉모당(奉謨堂)을 두었는데, 열성조의 어제·어필·어화(御畫)·고명(顧命)·유고(遺誥)·밀교(密敎)와 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장지(狀誌)를 봉안하였다. 정남(正南)에는 열고관(閱古觀)을 두었는데 상하 2층이고, 또 북쪽으로 꺾여 개유와(皆有窩)를 만들었는데 중국본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고, 정서(正西)에는 이안각(移安閣)을 두었는데 어진·어제 어필을 이봉(移奉)하여 포쇄(曝曬)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서북쪽에는 서고(西庫)로서 우리나라 본(本) 도서와 문적을 간직하였다(정조실록 1776년(정조 즉위) 9월 25일조).
이와 같이 규장각은 선대와 현재 국왕의 어제를 보관하는 국왕의 박물관 내지는 기록관에서 출발하여 도서관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학술연구 및 일성록 등의 출판을 담당하고 초계문신을 교육하는 국왕의 통치에 부응하는 다목적인 기구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