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은 고종이 즉위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자 망육순(51세)을 맞는 해였다.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존호를 올렸으며,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드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진연을 베풀고 어진을 제작하였다. 한편 세종로 사거리에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비를 건립하고 기념장.기념우표 등을 발행하였다. 이러한 기념행사와 기념물 등은 대내적으로 황제에 대한 위상을 높이는 한편 대외적으로 각국 원수와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과시하여 대한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02년은 고종 황제와 황실에게는 매우 뜻깊은 해였습니다. 그해 4월에는 고종 황제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11월에는 망육순을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하지만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은 광화문에 기념비전이 세워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행사가 여러 이유로 연기되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결국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진연의궤』의 시작인 권수에는 택일(擇日), 좌목(座目), 그림 등을 채웠습니다. 택일 항목에 고종 황제의 망육순을 축하하는 외진연(外進宴)은 11월 4일 중화전에서, 내진연(內進宴)은 11월 8일 밤에 관명전에서 치르고, 다음날 황태자가 주빈이 된 회작(會酌)은 오전 9시에 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진연 예행연습 날짜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외진연과 내진연에 참석하는 대상이 달라 구분한 것입니다. 외진연은 황제,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참석하는 자리인 반면 내진연에는 황실 가족, 친인척 및 명부(命婦) 등이 참여합니다.
그림은 반차도(班次圖), 진연도(進宴圖), 정재도(呈才圖), 채화도(綵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 등입니다. 반차도에는 외진연 등 다섯 차례의 진연에 참석한 사람과 사용한 기물을 직접 그리지 않고 그들의 위치를 한자(漢字)로만 표시하였습니다. 진연도에는 진연이 베풀어진 중화전과 관명전의 모습, 다섯 차례의 진연 전경이 담겨있습니다. 정재도에는 진연 축하 당시 춤과 노래의 공연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외진연은 25종, 내진연은 21종입니다. 여기에는 공연 모습뿐만 아니라 악공과 정재인들의 복식, 악기, 기물, 장식 조화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902년(광무 6년) 3월 18일에 고종의 51세와 등극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된 기념장이다. 재질은 은으로 앞면에는 기로소의 전각인 영수각(靈壽閣)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원유관과 기념 문구가 표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