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의 숭례문 - 역모의 공개처형장
Story
"숭례문(崇禮門) 밖의 무신년에 목을 벤 곳에서 금오당상이 친히 가서 정법(正法)하도록 하라." 1755년(영조 31) 영조가 윤지 일당을 처형할 것을 명령하는 말이다.[1]
영조 대가 되면 숭례문은 전대과는 전혀 다른 장소로 사용되었다. 숭례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왕이 도성 밖을 드나드는 문이었고, 신하들을 송별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중국신하가 가지고 온 황제의 조칙을 맞았다. 남대문 앞에는 연못이 있어 제철을 만나면 느긋함을 즐기는 선비들로 가득하였다. 혹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모이는 저자가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 밝음과 어두움으로 양자 택일한다면 남대문은 밝음에 속하는 곳이었다. 설사 영조가 이곳을 선로포의나 헌괵의를 치르던 장소로 사용할 때 폭력이 노골화되었더라도 그 의식은 전승을 기리는 밝은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런데 이른바 나주괘서 사건의 연루자들을 처벌하는 장소로 사용된 남대문은 그야말로 지옥문이었다. [2]
나주괘서사건은 여러가지 말로 불린다. 을해옥사. 윤지의 난. 소론인 윤지가 적소(謫所)인 나주에서 노론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은밀히 세력을 규합해 모의를 계획하고 있었다. 윤지는 아들 광철(光哲)과 함께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및 이효식(李孝植), 박찬신(朴纘新) 등 서울과 지방 각지의 소론을 모으고, 벼슬에 나아가지 못한 불평분자들을 끌어들여 점차 기반을 구축해갔다. 윤지는 거사 전에 우선 인심을 동요시키고자 1755년 1월에 나주 객사(客舍)에 나라를 비방하는 괘서를 붙였고, 푸닥거리로 민심을 현혹시키며 동지 규합에 힘을 썼다.그러나 거사 전에 괘서가 발각되었다. 이로써 윤지는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았으며, 그해 2월에 처형 당하였다. 이 때, 박찬신 및 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원찬(遠竄)되었다.[3]
당시 처형 장소가 숭례문이었다는 것은 이 문이 이제는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숭례문이 공공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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