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G.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에 두번 째로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W.B.스크랜턴의 집을 사서 방 두 칸을 허물어 교실 1칸을 만들었다. 그리고 8월 3일에 이겸라와 조종필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폴크 공사는 고종에게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또 앞으로 여러 학생을 교육할 뜻이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 주었다. 고종은 그해 10월 학생 수는 20명으로 늘었다. 영어를 배워 출세 하려는 학생이 몰려들자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라고 설립 목적을 밝혔다고 한다. 그럼에도 배재학당에서는 막연한 인문 교육보다는 실용 교육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배재학당을 거쳐 나온 학생들은 과연 그의 뜻대로 어떤 삶을 살았을까. 많은 졸업생 중에서 유명한 사람으로는 이승만, 주시경, 여운형, 지청천,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들의 행로를 보면 한가지 유사점이 있는데 입학 전에 어린 시절부터 어느 정도 한문을 통해 유학(儒學)을 공부하였던 전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영어 공부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거나 미국으로 유학할 기회를 비교적 쉽게 얻었다. 그리고 배재학당에 들어온 인연으로 대개는 정동교회에 나가서 협성회에서 활동하여 후일 기독교에 입교한다. 그리고 협성회에 선생님으로 나왔던 서재필의 영향으로 독립협회, 독립신문, 만민공동회, 뒤에는 신민회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거나 미국으로 유학할 기회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