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년 ~ 1924년】. 심의석(沈宜錫). 서울에서 태어나 정동(貞洞)에서 거의 전생애를 보낸 한학(漢學)을 배운 세대이다. 그에게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서구건축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중심으로 서구문명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그의 첫 번째 신건축 참여는 배재학당(1887)으로, 단층 벽돌조 건물인 교사(校舍)는 그가 처음으로 벽돌건축에 참여한 경험을 쌓은 건축물이었다. 이어 시병원(施病院, 1890)을 건립하였으며, 1896∼1897년에는 러시아의 건축가인 사바틴(Sabatin, A. I. S.)의 설계에 따라 서대문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기념할 만한 석조건조물로서 독립문을 세웠다.그는 서양인들을 통하여 서양건축술을 터득하여 학교·병원 등 각종 건축물의 신축에도 계속 참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의 건축이었다. 정동교회는 1895년에 착공, 1898년 10월에 준공되었는데, 이 교회의 3층 벽돌조 종탑(鐘塔) 건조는 건축기술사적으로 독립문의 석조구조물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 밖에 서양건축물로서 정동 이화학당본관(Main Hall, 1897∼1899), 상동교회(尙洞敎會, 1900∼1901)가 있다.한편 그는 파고다공원 내의 팔각정(八角亭, 1897), 조선호텔 내의 원구단(圜丘壇)과 황궁우(皇穹宇) 그리고 석고단(石鼓壇, 1901.11.),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紀念碑閣, 1902.9.) 등 전통건축에도 참여하였다. 또, 당시의 선각자 이채연(李采淵)·남궁 억(南宮檍)과 함께 서울을 개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니, 우리 나라 최초의 극장이며 또한 최초의 원형극장인 협률사(協律社, 1902.8.)는 그가 세운 것이다. 그 밖에 이화여고 프라이홀(Fry Hall) 자리에 있던 손탁(孫鐸)호텔(1902∼1903), 덕수궁 내의 석조전(石造殿, 1909) 등도 그가 지었다.한일합방 후에는 관직에도 올라, 개화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참사(參事)가 되어 참사제도가 폐지된 1919년까지 내부아문(內部衙門)의 기사직(技師職)에 있었다. 우리 나라 전통건축의 마지막 세대인 동시에 개화기 신건축의 첫 세대로서, 또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활동하였던 도시건설자·건축가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심의석(沈宜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