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은 고종황제와 함께 태어났다. 황제인 이상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야 하므로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가 되는 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구였다.[1]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환구단은 고종과 운명을 함께 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이 되었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호텔도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의 증가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무엇보다 총독부가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2]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3] 더욱이 이 호텔 자리는 환구단이 건립되기 이전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 자리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