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즉위 30년을 기념하여 숙종 32년(170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린 진연(進宴)의 장면과 좌목(座目), 후서(後序) 등을 기록한 첩이다. 표지는 뒷 시기에 새로 장정한 황색 종이에 ‘진연도첩(進宴圖帖)’이라는 제첨을 붙였다. 표지 다음의 제1ㆍ2면에 진연도(進宴圖) 그림이 있고, 그 다음 6장(12면)에 좌목을 기록했으며, 마지막 8번째 장 2면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후서가 실려 있다.
숙종은 이미 한해 전부터 진연을 열고자 한 왕세자와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진연 날짜를 두 차례 연기한 끝에 진연을 허락하였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왕세자가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는 상소문 등 28건의 기사가 있다. 결국 1706년(숙종 32) 8월 27일과 28일에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과 왕세자가 참여하는 외연(外宴)을,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비빈들이 참여하는 내연(內宴)을 각각 치렀다.
<진연도>는 인정전과 그 앞뜰에서 연회가 진행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인정전에서의 외연에는 왕세자와 두 명의 왕자인 연잉군(延礽君), 연령군(延齡君)을 포함하여 167명의 관료들이 참석하였다. 인정전 앞에는 차일(遮日)을 쳤고, 그 앞쪽에는 무대처럼 가설하여 만든 보계(補階)를 놓은 상태이다. 『숙종실록』에 기록된 참석자들과 그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2품 이상의 종친(宗親), 의빈(儀賓)은 왕세자 자리의 북쪽과 남쪽에, 문무관은 보계 위에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전(殿)에 오르지 못한 자는 남쪽 계단 아래에 동서로 나누어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리의 구성은 1744년에 출간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의 배반도(排班圖)인 <인정전진연지도(仁政殿進宴之圖)>와 비교가 된다. 조선시대의 궁중 예연(禮宴)은 보통 효도의 예로 여겨졌는데, 진연을 설행한 실질적인 목적은 술잔을 올리는 헌수(獻壽)에 있었다. 이 진연에는 왕세자를 시작으로 아홉 번 술잔을 올렸으며 세 번째 헌수할 때부터 여러 종류의 춤이 공연되었다.
보계 위에 도열해 앉은 신료들의 관복은 남색, 청색, 녹색 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매우 큰 붉은 흉배(胸背)를 부착하였다. 인정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마주보고 앉은 신료들의 사이 공간에는 긴 소매를 한 네 명의 무동(舞童)들이 춤을 추고 있다. 그 아래에는 주탁(朱卓)과 사옹원 부제조가 양쪽에 서 있다. 이들의 중간에는 약간 아래쪽으로 고(鼓)가 있고, 그 남쪽으로 네 명의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편으로 의장과 호위 군관들이 도열해 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視點)을 취하여 인정전의 내부와 전방의 공간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인정전의 내부 가운데는 오봉병(五峯屛)을 배경으로 한 어찬안(御饌案)이 있고, 어좌(御座)가 있다. 어좌에는 왕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친림(親臨)해 있다. 어좌의 동남쪽 아래에는 왕세자의 찬안이 90도 각도로 틀어진 상태로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궁중의 진연도에서 볼 수 있는 불합리한 부분이지만, 관행적인 표현이다.
이 《진연도첩》의 좌목에 열거된 인물의 수와 실록 기사에 열거된 인물 수는 차이가 난다. 『진연도첩』의 ‘진연시입참동서반좌목(進宴時入參東西班座目)’에는 위와 같이 직위별 명단이 아닌 의장물을 들고 있는 순서로 보검(寶劍) 4명, 운검(雲劒) 4명, 시위(侍衛) 24명, 종실(宗室) 39명, 재신(宰臣) 17명, 시종(侍從) 79명 등 모두 167명의 인원이 열거되어 있다.
최석정의 후서인 「진연도첩후서(進宴圖帖後序)」는 진연이 있고난 6년 뒤인 1712년(숙종 38)에 쓴 것이다. “의정부 이하의 각사(各司)에서 각기 병풍과 족자 등의 그림과 가영(歌詠)으로 이 행사의 영구한 징표로 삼기위해 기로소(耆老所)에서는 첩자를 만들어 나에게 그 뒤에 글을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나는 이미 정부(政府)의 도병(圖屛) 서문에 그 행사의 의식 및 진계(陳戒)와 송도(頌禱)의 말을 모두 실었으므로 (이 도첩을) 보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고 적어놓았다. 당시 궁중의 경사나 행사가 있을 시에는 여러 관청의 주요 관료들이 돈을 내어 기념이 되는 병풍과 첩을 만들어 기념물로 간직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며, 이 <진연도첩>은 기로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려준다.
《진연도첩》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림 가운데 궁중에서의 진연장면을 그린 것으로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기록화이다. 그림 속의 연회의 장면과 각 인물의 복식, 각종 의례용품 및 기물 등은 진연행사를 재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이후 그려지는 궁중 진연도 및 행사도의 전형을 예고해 주는 작품이다. 조선후기의 궁중기록화 뿐만 아니라 진연과 관련된 음악, 복식, 전통음식 등의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