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무희를 사랑한 프랑스공사 콜랭 드 플랑시.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는 조선과 프랑스가 외교관계를 맺은 1886년에 조선을 방문했다. 1890년 어느 날 프랑스 초대공사와 외국인 관계자들은 조선 왕실의 초대를 받았다. 왕궁에서는 무희들의 공연이 열렸고, 이때 이화심(리진)이 플랑시의 눈에 들어왔다. 플랑시는 고종의 배려로 그 무희와 함께 하게 되어 이후 둘 사이에 사랑이 시작되었다. 플랑시는 주한 대리공사의 임기가 끝날 무렵, 리진을 프랑스에 데려가기로 결심하고 1893년 5월 4일 파리로 향했다. 한국을 떠나 유럽에 도착한 플랑시는 리진과 결혼식을 올렸다. 리진은 최초로 유럽 땅을 밟은 조선 여인이 됐다.
당시 파리는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였고, 풍요로로운 문명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파리의 지성을 깨우친 리진은 플랑시의 도움으로 가정교사를 통해 불어를 배웠다. 리진은 불어를 통해 프랑스의 가치를 알았고, 기독교를 접하면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예술가로서 숨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사교모임에서 상류계층과 자주 어울렸다. 어느 자리에서나 리진은 돋보였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리진은 급속도로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제2대 조선 주재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를 역임했던 이폴리트 프랑댕은 「한국에서」 라는 책에서 리진을“안락의자에 푹 파묻혀 앉은 이 가련한 한국 여인은 너무나 야윈 나머지 마치 장난삼아 여자옷을 입혀 놓은 한 마리 작은 원숭이 같아 보였다”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리진을 위해 플랑시는 파리에 한국식 규방을 만들어 위로해주고자 했으나, 플랑시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진의 우울증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파리에 떠난지 4년 만에 리진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1896년에 플랑시가 주한 프랑스 3대 공사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진은 더 이상 플랑시와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리진은 본래 왕실 소속 무희로서 자유롭지 못한 신분이었으므로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고위관료에게 끌려갔던 것이다. 파리의 근대문명을 경험한 리진은 무희로서의 삶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리진은 금조각을 삼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플랑시는 을사늑약으로 주한 프랑스 공사관이 폐쇄되자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방콕을 거쳐서 프랑스로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