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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1월 18일 (목) 08:11 판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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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의 가짜 즉위식

Story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 한 것일까? (순종의 즉위는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루어진 사건이라, 과정도 복잡하고 즉위의 정통성 논란도 있습니다. 그래서 글의 내용과 논리 전개가 여러번 바뀌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사는 캐롤 쇼(Carole Shaw) 여사는, 존스 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던 남편 윌리엄 쇼(William Shaw) 박사의 한국관련 자료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탈리아 잡지에 실린 '조선의 새 황제 이척의 즉위식'이라는 설명이 달린 삽화 그림을 발견했다.

그녀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는 아니었다. 한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남편의 뒤를 이어 한국사를 연구한 '재야 사학자'다. 그녀는 선교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1950년부터 한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했고, 1959년에는 서울의 외국인 학교를 다니다 윌리엄 쇼를 만나 몇 년 후에 결혼을 했다.

그녀의 시조부는 일제강점기 때 평양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였고,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시아버지는 1950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 중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미 해군 대위로 재입대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다.

이렇게 친정과 시집 모두가 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쇼 부부는 1965년 제1기 평화봉사단원으로 서울을 방문했고, 남편 윌리암 쇼는 서울대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남편은 하버드대에서 한국학 박사과정을 밟은 후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했는데, 1993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허망하게 남편을 떠나보낸 그녀는 남편의 한국학 연구를 총정리하는 책을 쓰겠다며, 자료를 정리하다 '조선의 새 황제 즉위식'이 실린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남편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은 1907년 8월 27일이었다. 한국근대사 전공자가 아닌 쇼 여사로서는 8월 27일 이전의 즉위식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07년 고종의 양위와 순종의 즉위는 우리 근대사에서 임금(황제)이 바뀌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순종의 즉위가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정이 복잡하고 적법성 논란도 있다. 그래서 우리 근대사에서 이 부분은 아직 명확하게 정리 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쇼 여사는 '즉위식' 그림이 실린 잡지를 서울대학교에서 근대사를 강의하는 이태진 교수에게 보내 자문을 구했고, 이 그림은 이렇게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태리 신문 -2 -ss.jpg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La Tribuna Ilustrata)' 1면에 '조선의 새 황제 즉위식'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린 삽화 그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소장)

이태진 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는 캐롤 쇼 여사가 보낸 삽화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연구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소개하면서 "1907년 7월 20일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에서 내관(환관)들의 대역으로 치루어진 양위식"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질의 응답 시간에 기록의 근거를 묻자 "나라사키라는 일본 기자가 쓴 <한국정미정변사>(1907, 경성, 일한서방)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이태진, 태학사, 2005) 그러나 이탈리아 잡지에 실린 삽화가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인지는, '고종실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종실록' 1907년 7월 18일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광무황제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 하게 하는 조칙을 발표하고 의식을 거행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大事)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代理)하게 하노니, 의식절차는 궁내부(宮內府)와 장례원(掌禮院)에게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8일

대리청정 의식은 다음 날인 7월 19일 오전 7시에 덕수궁 중화전에서 거행되었다. 그런데, 고종과 순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궁중의 누군가(내시로 추정) 대리청정 의식을 대행했다. 이런 중요한 의식을 대리로 거행했다는 사실을 믿기가 쉽지 않지만, '고종실록'에도 대리로 거행하라는 어명이 기록되어 있다.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권정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임금이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임금이 나오지 아니한 채 임시방편으로 거행하던 식(式)'이라고 나와있다.

따라서 1907년 8월 4일자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La Tribuna Ilustrata)'에 실린 그림을 정확하게 설명하면 대리청정 의식이다. 그림의 장소도 '고종실록'에서 "권정례로 하라"면서 언급한 중화전이다.


덕수궁 중화전 내부

1907년 7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도 "상오 칠시에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같은 내용의 외교전보를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냈다.(통감부 전보 번호 제76호 : 今朝七時宮中中和殿ニ於テ權停禮ヲ施行) 그러나 누가 대신했는지를 알려주는 공식 기록은 없다.

대한매일신보도 1907년 7월 19일(광무 11년 금요일)에 호외를 발행해서 "상오 8시에 황제폐하께서 황태자전하께 대리를 명하시옵고 조칙을 반포하였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고종이 사용한 "대리"라는 단어에는,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황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다는, 고종 나름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있었다.

고종 전에 가장 가까운 대리청정은 영조 51년(1775)에 있었다. '영조실록' 1775년 12월 7일(양력)자에 보면, 만약 대신들이 계속해서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할 경우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만약 이 하교를 따르지 않을라치면 전위(傳位)하는 하교를 내리겠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의 대리청정은 양위가 아니었고, 황태자도 이런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읽었다. 그래서 대리청정 조칙을 취소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정사와 기무(機務)가 어떤 모양인 줄 살피지 못해 막연하기만 한데 천만 뜻밖에 정사를 대리하라는 칙령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

"소자는 나이가 비록 한창 때지만 어리석음이 아이 때와 다름이 없으니, 어떻게 복잡한 정사를 대리할 수 있겠습니까? ”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첫번째와 두번째 상소 부분

"장례원 경(掌禮院卿) 박용대(朴容大)가 아뢰기를,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할 길일(吉日)은 언제쯤으로 잡을까요?” 하니, 비준하기를, “오늘 거행하라.”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당시 고종과 황태자 그리고 측근 대신 박용대는 조칙이 '대리청정'임을 계속 강조했다.

'대리청정'과 '권정례'는 일본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대신들의 퇴위 요구에 대한 고종의 반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이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본 역시 고종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임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제 합병에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고종을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던 중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이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리청정을 선언했으니, 1907년 7월 19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거행되었던 대리청정 의식을 어떻게 불러야할까?

이토 -4.jpg

'대리 즉위식'에 참가한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에게 응징 당한 이토 히로부미

이 게시물을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 차관과 총리대신에게 '한제 양위식 거행 건(韓帝讓位式 擧行 件)'(왕전 往電 제76호)이라는 제목으로 외교 전보를 보냈다. 덕수궁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 대리로 한 이 '대리청정' 의식을 양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많았는지, 외무장관은 '한국황제 양위확인(韓國皇帝 讓位確認) 및 양위식(讓位式)에 관한 件'(내전 來電 제846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의 이사관과 부이사관들에게 내부문건을 회람시킨다. '대리청정 조칙은 양위의 의미가 명백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양위식이라면 고종의 대리청정 선언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언이 되고, 순종이 권정례로 어좌에 앉아 하례를 받는 의식은 즉위식이 된다. '조선의 새 황제 이척 즉위식'이라는 이탈리아 잡지의 그림 설명도 맞는 설명이 된다. 그런데 순종은 약 40일 후인 8월 27일에 즉위식을 했다. 그렇다면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한 것일까?

순종은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고, 이런 모순은 즉위식이 거행된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고종실록'은 7월 18일의 "권정례로 거행하라"는 어명이 마지막 기사다. 영조때도 세손인 정조가 대리청정을 한 적이 있지만 '영조실록'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대리청정임을 밝혔는데도 '고종실록'을 끝내고 '순종실록'을 시작했으니 전례에 맞지 않는 모순이다.

  1. 일그러진 절차 끼워 맞추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시대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7월 19일

'순종실록' 첫번째 기사이다. 고종은 대리청정에 대한 조칙을 내렸을뿐 선위(양위)는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기록했다. 훗날 '순종실록'을 편찬할 때 일본의 강압에 의해 '선위'라는 단어를 끼어 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렇게 '양위'를 끼워 넣었다는 정황은 일본 황제의 축하 전보 날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 황제는 7월 19일이 아니라 다음날인 7월 20일에야 "황제를 이어 받은 것에 대해 충심으로 경하한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통감 이토히로부미의 외교전보를 받은 후, 그의 보고대로 대리청정을 양위로 인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하느라 전보를 하루 늦게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로 봉존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과 법부 대신(法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이 아뢰기를, “이번에 왕위를 주고받은 예전(禮典)은 바로 대성인(大聖人)의 정일(精一)한 심법(心法)에 말미암은 것이니... -- 순종실록 즉위년(1907) 7월 21일

당시 민심은 흉흉했다. 성난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친일 대신들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라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내부 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은 “도성 안의 민심이 동요하고, 심지어는 대신에게 돌을 던지고 집을 불살라버리는 일이 날마다 발생" 한다며 서울의 치안을 담당한 한성부윤을 해임하라는 건의를 했다.(실록 7월 21일)

이런 와중에서도 친일대신들은 순종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이제부터 조서, 칙서, 아뢰는 글들에 ‘대리(代理)’라는 칭호는 ‘황제(皇帝)’라는 대호(大號)로 높여 부르는 것이 실로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되므로 신들은 같은 말로 호소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을 받들어 힘써 따르겠다.” 하였다.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7월 22일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윤비'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때 사용하던 '광무' 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개정할 연호(年號)의 망단자(望單子)를 융희(隆熙)와 태시(太始)를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받든 주권(硃圈)에 융희 두 글자로 하라고 하였다. -- '순종실록' 순종 즉위년(1907, 광무 11년) 8월 2일 (양력)

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실록'에 사용되었다. 같은 날, 고종이 태황제가 되는 절차가 끝났으니 거처하는 경운궁의 이름도 바뀌어야 한다며 덕수궁으로 바꿨다.

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치 끼워 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자를 8월 27일로 정한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이 아니라 외국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으로 정했다.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중략 -- 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순종실록' 즉위년(1907,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순종은 이왕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에 앉았다.

순종 -4 -s -2.jpg 김은호 <순종황제어진 초본>, 종이에 수묵초본, 60 x 45.7cm, 192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절 임금의 행사를 기록한 <일성록>에는 즉위식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

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 --<일성록> 1907년 8월 27일 (한국고전번역원 오세옥 연구원 번역)

'대리청정'과 '대리 양위' 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다. 미국의 재야사학자 캐롤 쇼 여사에 의해 발굴된 삽화 그림은 당시 고종과 순종의 절박한 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고, 그래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1]


1907년 伊잡지에 실린 日帝 ‘순종 대리 즉위식’ 대한제국 시절 일제가 대리인을 내세워 열었던 순종황제 즉위식 모습을 생생히 담은 그림이 발견돼 11일 공개됐다. 1907년 7월 20일 서울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중화전에서 열렸던 순종황제의 즉위식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년 8월 4일자 표지에 실렸던 것. 순종황제가 아버지인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데 항의해 불참하자 일제가 대리인을 앉혀 놓고 즉위식을 열었음을 그림 속 황제 자리에 앉은 녹색 복장의 환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순종황제의 강제 즉위식 등 대한제국 시절 전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희귀한 그림들이 발견됐다. 서울대 이태진(李泰鎭·한국사) 교수는 11일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인 캐럴 쇼 씨가 최근 미국에서 찾아내 기탁한 그림들을 공개했다.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7년 8월 4일자 표지에 실린 순종황제 즉위식 그림. 일제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뒤 1907년 7월 20일 병력을 동원해 서울 경운궁(慶運宮·현재의 덕수궁)을 포위한 채 중화전에서 순종황제의 즉위식을 가졌다. 그러나 순종황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한 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 참석을 거부한 것이다. 일제는 순종황제 대신 어좌(御座)에 대리인을 앉혀 즉위식을 강행했다. 이런 사실은 그간 사료를 통해 알려져 온 바이지만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확인된 것.

이 교수는 “초록색 관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어좌에 앉은 사람은 환관(宦官)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 즉위식 상황을 보여 주는 귀중한 그림 사료”라고 평가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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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La Tribuna Illustrata 1907년 8월 4일호 제15권 제31호 1면 순종의 즉위식을 그린 일러스트 http://archive.much.go.kr/archive/nrms/view.do?idnbr=PS01002025008-005798-00000
참고 동아일보 日帝, 순종 항의에 환관 대신 앉혀 (2005-08-12, 이광표 기자)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050812/8218504/1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 네이버캐스트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순종황제 즉위식 광경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59020&docId=3575313&categoryId=59034
참고 김선주 학교 > 그림으로 보는 우리의 근대 순종은 즉위식을 두번 한 것일까? http://www.sunjooschool.com/class_published_ModernPainting/7818
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 일제침략기 한국관련 사진그림엽서 DB 황태자전하 한국황제 즉위 / 한국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덕수궁 중명전에서 행차를 준비하는 가마를 인쇄한 엽서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7-KFR-1230003&callType=srch&dataID=AKS-2017-KFR-1230003_TEXT@0019
삽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http://archive.much.go.kr/nrms/pur005/2018/0716170014194/pur005798-00000-00001.jpg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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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신동규, 「일제침략기 한국 사진그림엽서의 탄생과 엽서의 분류 및 시대구분법에 대한 소고」, 『일본문화연구』 71, 동아시아일본학회, 2019.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87391
논문 이정희, 「대한제국기 순종황제 즉위 행사와 음악」, 『한국음악사학회』 47, 2011.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17576
단행본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태학사, 2005. RISS http://www.riss.kr/link?id=M10091366
단행본 고연희·김동준·정민 외,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 : 우리 시대 인문학자 32인의 그림 읽기, 문화 그리기』, 태학사, 2013. RISS http://www.riss.kr/link?id=M13326174
단행본 정민·김동준 외,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 2016. RISS http://www.riss.kr/link?id=M12316603
단행본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국립중앙박물관 역사자료총서 17), 2017.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report/article_13768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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