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원년) 9월 25일 고종의 후궁 엄씨의 출산 후에 배출된 영친왕의 태(胎)는 태항아리에 담아 숙옹재 산실 안 월덕(月德) 병방(丙方)에 안치하였다. 출산 후 삼일 째인 9월 27일 산실 길방에 놓아두었던 태를 씻었다. 숙옹재 앞 뜰에 월덕 병방의 물을 자정에 길러 넣어 둔 독 4좌를 배열하였다. 묘정 초각 금루에서 시각을 아뢰자 호산관이 흑단령을 차려 입고, 차지와 종사관이 함께 차례로 서고, 의녀 죽엽과 진향이 태항아리를 받들고 나가 도소라에 옮겨 담고 병방의 물을 부어 깨끗이 씻은 후 향온주로 다시 씻었다. <개원통보>의 글자면이 아래로 가게 하여 태를 안치한 태항아리를 봉하였다. 붉은 목패 전면에 쌍행으로 ‘광무 원년 9월 25일 궁인 엄씨가 순산한 남자 아기씨 태’라 쓰고, 뒷면에 차지내관과 호산의원의 성명을 함께 써 넣었다. 세태의식을 마친 후 엄씨와 아기씨의 세욕이 진행되었다. 9월 30일 산후 초칠일에 숙옹재 대청에서 권초제를 행한 후 장태중사 김규복을 선두로 한 48명의 장태행렬은 석류문과 선양문, 새로 세운 목책문, 은행소 앞 길, 정동, 명례궁 앞 길, 사동, 황토현, 혜정교, 파자전, 석교, 돈화문 앞길, 금호문,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동용문, 경화문, 집례문, 숭지문, 명광문, 청양문, 금마문, 연경당 앞 길을 거쳐 능허정 남쪽 기슭 자좌에 영친왕의 태를 안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