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북경주재 러시아공사관의 무관을 지냈고 야마가타의 모스코바 방문시 러시아의 수행참모역을 한 바 있다. 뿌챠타는 현지에서 러시아 군사교관에 의한 조선군의 훈련과 조직 등에 관하여 형식상으로는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이들 교관단의 장교·하사관 모두가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고용되었지만, 뿌챠타만은 조선정부에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뿌챠타는 출발전 고종의 신변경비와 조선군의 훈련을 위해 필요한 러시아군의 파견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가 파견을 요청한 군사의 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에서 규정하고 있던 조선내 주둔 일본군과 같은 수인 800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로바노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보류되고 있었다. 로바노프는 군부대신 반노프스키나 뿌챠탸의 거듭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상황이 좀더 명료해진 뒤에야 군사교관의 파견이 가능하다는 입장하에 이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주장을 견제하던 로바노프가 갑자기 사망하자 군부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확대되었다.로바노프가 사망한 것은 민영환특사가 귀환중이던 8월 31일, 사행이 로바노프를 작별한지 약 2주만이었다. 민영환과 동행했던 뿌챠타는 하바로프스크에 이르러 급한 일로 뒤에 남았다가, 뒤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영환 일행과 다시 합류하였다. 러시아가 13명의 군사교관을 출발시키기로 한 것은 민영환특사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바로 그 직후였다. 즉 민영환과 합류한 뿌챠타는 거기서 러시아 당국에 군사교관을 출발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이후 그들은 군사교관들과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