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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궁 행사는 왕, 왕비가 궁 밖에서 예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행되던 행사이고, 침향산은 국왕과 왕비의 환궁 행렬 시 설치되었던 산대를 말한다. '침향산붕', '향산', '침향산대'라고도 불린 이 오브제는 바퀴를 달아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br/> | 환궁 행사는 왕, 왕비가 궁 밖에서 예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행되던 행사이고, 침향산은 국왕과 왕비의 환궁 행렬 시 설치되었던 산대를 말한다. '침향산붕', '향산', '침향산대'라고도 불린 이 오브제는 바퀴를 달아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br/> | ||
− | 대표적인 환궁 행사로는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부묘의(祔廟儀)를 행한 후 돌아올 때의 환궁 행사를 꼽을 수 있다. 부묘의는 흉례의 마무리 단계의 절차로 선대 왕과 왕비가 후대 왕과 나라의 운명을 굽어 살피는 조상신으로 거듭하게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 금기가 풀리는 '해방'의 의미도 갖는다. 이때문에 부묘의는 종묘친제 등 여타 다른 의례가 가지는 의미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묘의를 통해 왕실 가족을 비롯한 백성의 근신이 마무리 되니, 모두 건강하게 흉례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화려한 축제가 수반되었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9088 김은영,「고려·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 기로·유생·교방 삼가요(三歌謠)의 성립을 중심으로」,『공연문화연구』21,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ref | + | 대표적인 환궁 행사로는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부묘의(祔廟儀)를 행한 후 돌아올 때의 환궁 행사를 꼽을 수 있다. 부묘의는 흉례의 마무리 단계의 절차로 선대 왕과 왕비가 후대 왕과 나라의 운명을 굽어 살피는 조상신으로 거듭하게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 금기가 풀리는 '해방'의 의미도 갖는다. 이때문에 부묘의는 종묘친제 등 여타 다른 의례가 가지는 의미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묘의를 통해 왕실 가족을 비롯한 백성의 근신이 마무리 되니, 모두 건강하게 흉례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화려한 축제가 수반되었다.<ref>[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9088 김은영,「고려·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 기로·유생·교방 삼가요(三歌謠)의 성립을 중심으로」,『공연문화연구』21,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ref> 뿐만 아니라 부묘의를 마친 것을 기념하여 유교적 가치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죄인의 사면을 공표하기도 했을 정도로 왕에게는 그 권위와 관대함을 보여줄 수도 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실록을 통해 부묘 후 이루어진 거가환궁 행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단종실록 11권 1454년(단종 2) 7월 16일 기사에는 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부묘한 행사의 전 과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ref>[https://sillok.history.go.kr/id/kfa_10207016_001 문종대왕과 현덕 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다]</ref> |
한편 왕실 의례가 아니더라도 왕실의 주요한 인물이 환궁할 때 역시 환궁 길목에 침향산을 세우고 공연을 거행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br/> | 한편 왕실 의례가 아니더라도 왕실의 주요한 인물이 환궁할 때 역시 환궁 길목에 침향산을 세우고 공연을 거행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br/> | ||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1440년(세종 22) 삭제(朔祭, 왕실에서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후 일찍이 앓던 풍병을 치료하고자 온수현(현재 온양) 온천을 다녀온다. 소헌왕후가 온천에서 돌아올 때에 왕세자가 헌릉 동구에 나가 맞이했고, 숙의, 소용, 왕세자빈은 삼전도에서, 각 사의 관원 한 사람씩은 흥인문 밖에서 왕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흥인문부터 광화문까지 모두 결채되어 공인이 풍악을 연주하면서 앞에서 인도해 수진방에 이르러, 교방의 기생이 가요를 올렸는데, 이 때 침향산을 두고 공연을 했고, 왕비가 연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는 기록을 세종실록에서 볼 수 있다.<br/> |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1440년(세종 22) 삭제(朔祭, 왕실에서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후 일찍이 앓던 풍병을 치료하고자 온수현(현재 온양) 온천을 다녀온다. 소헌왕후가 온천에서 돌아올 때에 왕세자가 헌릉 동구에 나가 맞이했고, 숙의, 소용, 왕세자빈은 삼전도에서, 각 사의 관원 한 사람씩은 흥인문 밖에서 왕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흥인문부터 광화문까지 모두 결채되어 공인이 풍악을 연주하면서 앞에서 인도해 수진방에 이르러, 교방의 기생이 가요를 올렸는데, 이 때 침향산을 두고 공연을 했고, 왕비가 연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는 기록을 세종실록에서 볼 수 있다.<br/> | ||
위 두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환궁행사시 침향산이 놓인 장소는 혜정교 동쪽과 수진방 두 곳으로 지도를 통해 볼 때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교보빌딩 후문 쪽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침향산을 활용한 공연은 도착을 기준으로 광화문에 가까워 왔을 때 보게 되는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br/> | 위 두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환궁행사시 침향산이 놓인 장소는 혜정교 동쪽과 수진방 두 곳으로 지도를 통해 볼 때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교보빌딩 후문 쪽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침향산을 활용한 공연은 도착을 기준으로 광화문에 가까워 왔을 때 보게 되는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br/> | ||
− | 침향산은 불교문화와 관계 깊은 산대로, 중 인형, 불탑, 동물 잡상이 설치된다는 점이 이를 설명해준다. 침향산을 소품으로 하여 연행된 공연으로는 학무, 연화대를 들 수 있는데, 침향산에 배치된 잡상과 공연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맥락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ref>최윤영, 「침향산(沈香山) 조설방식의 특성과 연행양상」, 『구비문학연구』28, 한국구비문학회, 2009.<ref | + | 침향산은 불교문화와 관계 깊은 산대로, 중 인형, 불탑, 동물 잡상이 설치된다는 점이 이를 설명해준다. 침향산을 소품으로 하여 연행된 공연으로는 학무, 연화대를 들 수 있는데, 침향산에 배치된 잡상과 공연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맥락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ref>최윤영, 「침향산(沈香山) 조설방식의 특성과 연행양상」, 『구비문학연구』28, 한국구비문학회, 2009.</ref> 공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물품이다. |
− | 이렇게 침향산은 광해군 때까지 환궁 행사에 등장하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1623년에 침향산을 제작하고, 유지·보수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태워 없앨 것을 명하면서 이후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비슷한 형태로 [[지당판]]이 전해져 오는데, 침향산이 가산형(假山形) 이동식 산대인 반면 지당판은 침향산처럼 봉래산이 없는 등수형(燈樹形) 이동식 산대이다.<ref>이숙희, 「지당판(池塘板)의 구조와 성격」, 『공연문화연구』28, 한국공연문화학회, 2014.<ref | + | 이렇게 침향산은 광해군 때까지 환궁 행사에 등장하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1623년에 침향산을 제작하고, 유지·보수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태워 없앨 것을 명하면서 이후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비슷한 형태로 [[지당판]]이 전해져 오는데, 침향산이 가산형(假山形) 이동식 산대인 반면 지당판은 침향산처럼 봉래산이 없는 등수형(燈樹形) 이동식 산대이다.<ref>이숙희, 「지당판(池塘板)의 구조와 성격」, 『공연문화연구』28, 한국공연문화학회, 2014.</ref> |
==Semantic Data== | ==Semantic Data== |
2022년 12월 16일 (금) 05:06 판
목차
기록으로 보는 다양한 오브제와 공연 예술 풍경 》 환궁 행사와 '침향산'
Story
환궁 행사는 왕, 왕비가 궁 밖에서 예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거행되던 행사이고, 침향산은 국왕과 왕비의 환궁 행렬 시 설치되었던 산대를 말한다. '침향산붕', '향산', '침향산대'라고도 불린 이 오브제는 바퀴를 달아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환궁 행사로는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부묘의(祔廟儀)를 행한 후 돌아올 때의 환궁 행사를 꼽을 수 있다. 부묘의는 흉례의 마무리 단계의 절차로 선대 왕과 왕비가 후대 왕과 나라의 운명을 굽어 살피는 조상신으로 거듭하게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 금기가 풀리는 '해방'의 의미도 갖는다. 이때문에 부묘의는 종묘친제 등 여타 다른 의례가 가지는 의미보다 훨씬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묘의를 통해 왕실 가족을 비롯한 백성의 근신이 마무리 되니, 모두 건강하게 흉례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화려한 축제가 수반되었다.[1] 뿐만 아니라 부묘의를 마친 것을 기념하여 유교적 가치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죄인의 사면을 공표하기도 했을 정도로 왕에게는 그 권위와 관대함을 보여줄 수도 있는 행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종실록을 통해 부묘 후 이루어진 거가환궁 행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단종실록 11권 1454년(단종 2) 7월 16일 기사에는 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부묘한 행사의 전 과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2]
한편 왕실 의례가 아니더라도 왕실의 주요한 인물이 환궁할 때 역시 환궁 길목에 침향산을 세우고 공연을 거행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는 1440년(세종 22) 삭제(朔祭, 왕실에서 음력 초하룻날마다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후 일찍이 앓던 풍병을 치료하고자 온수현(현재 온양) 온천을 다녀온다. 소헌왕후가 온천에서 돌아올 때에 왕세자가 헌릉 동구에 나가 맞이했고, 숙의, 소용, 왕세자빈은 삼전도에서, 각 사의 관원 한 사람씩은 흥인문 밖에서 왕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흥인문부터 광화문까지 모두 결채되어 공인이 풍악을 연주하면서 앞에서 인도해 수진방에 이르러, 교방의 기생이 가요를 올렸는데, 이 때 침향산을 두고 공연을 했고, 왕비가 연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는 기록을 세종실록에서 볼 수 있다.
위 두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환궁행사시 침향산이 놓인 장소는 혜정교 동쪽과 수진방 두 곳으로 지도를 통해 볼 때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교보빌딩 후문 쪽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침향산을 활용한 공연은 도착을 기준으로 광화문에 가까워 왔을 때 보게 되는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침향산은 불교문화와 관계 깊은 산대로, 중 인형, 불탑, 동물 잡상이 설치된다는 점이 이를 설명해준다. 침향산을 소품으로 하여 연행된 공연으로는 학무, 연화대를 들 수 있는데, 침향산에 배치된 잡상과 공연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맥락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3] 공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물품이다.
이렇게 침향산은 광해군 때까지 환궁 행사에 등장하였는데, 인조가 즉위하고 1623년에 침향산을 제작하고, 유지·보수하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태워 없앨 것을 명하면서 이후에는 사용된 적이 없다. 비슷한 형태로 지당판이 전해져 오는데, 침향산이 가산형(假山形) 이동식 산대인 반면 지당판은 침향산처럼 봉래산이 없는 등수형(燈樹形) 이동식 산대이다.[4]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 class | groupName | partName | label | hangeul | hanja | english | infoUrl | iconUrl | note |
---|---|---|---|---|---|---|---|---|---|---|
E2022-R0-03A | Story | Episode | 환궁 행사와 '침향산'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0-03A | 2022:이한나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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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시장경제 | [세종실록과 왕실의학] <14> 왕들의 온천욕과 안질(2018-03-15, 최주리) | https://www.meconom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85 |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id | type | bibliographic index | online resource | 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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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ART001479088 | 논문 | 김은영, 「고려·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 기로·유생·교방 삼가요(三歌謠)의 성립을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21,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9088 |
KCI:ART001360504 | 논문 | 최윤영, 「침향산(沈香山) 조설방식의 특성과 연행양상」, 『구비문학연구』28, 한국구비문학회, 2009.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60504 |
KCI:ART001857439 | 논문 | 이숙희, 「지당판(池塘板)의 구조와 성격」, 『공연문화연구』28, 한국공연문화학회, 2014.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57439 |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 ↑ 김은영,「고려·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 기로·유생·교방 삼가요(三歌謠)의 성립을 중심으로」,『공연문화연구』21,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 ↑ 문종대왕과 현덕 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다
- ↑ 최윤영, 「침향산(沈香山) 조설방식의 특성과 연행양상」, 『구비문학연구』28, 한국구비문학회, 2009.
- ↑ 이숙희, 「지당판(池塘板)의 구조와 성격」, 『공연문화연구』28, 한국공연문화학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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