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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1-R0-02 | 개항기의 신식 화폐]] 》 근대적 화폐 제도의 도입'''=
 
='''[[S2021-R0-02 | 개항기의 신식 화폐]] 》 근대적 화폐 제도의 도입'''=
  

2022년 11월 24일 (목) 14:06 판


개항기의 신식 화폐 》 근대적 화폐 제도의 도입

Story

「신식화폐발행장정」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 11일에 공포된 조례로서, 1891년의 「신식화폐조례」를 바탕으로 화폐의 종류는 은, 백동, 적동, 황동의 4종을 두었으며, 은화를 본위 화폐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조 화폐로 삼았다. 이로써 은본위제도를 골자로 하는 근대적 화폐 제도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로 본위 화폐인 5냥 은화를 다량 제조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인천전환국은 보조 화폐 중 제조 차익이 큰 2전 5푼 백동화와 5푼 적동화의 제조에 치중하였다. 한편 「신식화폐발행장정」은 외국의 화폐라도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이면 국내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조항을 덧붙였는데, 이는 일본이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자국 화폐의 조선 진출을 합법화한 것으로 화폐 개혁에 필요한 사전 준비도 없이 불과 열흘밖에 안 되는 극히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공포된 것이었다.
1890년대 초 이미 세계 주요국이 금본위 제도로 이행하고 있었고 러시아와 일본도 각각 1893년과 1897년에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세계 적 조류에 따라 대한제국도 1898년 7월 28일에 금화를 본위 화폐로 하고 은화를 보조 화폐로 하기로 결정하였음에도 1901년 2월에야 비로소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는 「화폐조례(貨幣條例)」가 제정·공포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 은화의 통용을 억제하는 반면, 러시아 화폐의 체제를 본뜬 각종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1901년의 「화폐조례」는 일본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이 조례는 당시 탁지부 고문이었던 러시아 출신 알렉시에프(K. Alexieff) 의 영향을 받은 친러파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서 주된 목적은 금본위 제도로의 이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일본 각인은화의 통용을 금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화폐조례」가 발표됨과 동시에 일본 1엔 은화의 유통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이 조례는 일본의 화폐법과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일본의 화폐 단위인 엔(圓)과 같이 순금 2푼 (750mg)을 1환으로 하였으며 화폐의 종류도 유사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 궁핍으로 금화를 제조하지 못하였고 이 조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됨에 따라 「중앙은행조례(中央銀行條 例)」, 「태환금권조례(兌換金券條例)」와 함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하 나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1901년 「화폐조례」의 제정으로 대한제국의 화폐 제도가 은본위 제도에서 금본위 제도로 이행됨에 따라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화폐와 금융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설립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1902 년에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중앙은행조례」와 금본위 지폐 발행을 위한「태환금권조례」가 제정되어 이듬해 3월 24일 칙령 제8호로 공포되었다. 이는 화폐 제도와 금융 제도를 모두 쇄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에 대해 은행의 신용이란 쉽게 쌓이는 것이 아니어서 신생 중앙은행에 국고금의 취급을 맡기는 것이 어려우며 해관세의 취급은 일본 제일은행이 묄렌도르프와 계약하여 취급하 고 있는 만큼 대한제국 정부 임의로 바꿀 수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그 달 25일 중앙은행의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던 이용익이 일본으로 납치됨으로써 「중앙은행조 례」와 「태환금권조례」의 시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화폐 수요의 급증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차관을 받아 인천전환국의 확장을 시도, 착공하였으나 확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전환국을 용산으로 이전하라는 고종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고종이 이와 같은 명을 내린 이유는 경인선이 곧 개통될 예정이어서 경성의 교통․수송상 불편이 해소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인데,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한제국의 화폐권을 침해하려는 일본 측에 대항하여 전환국을 경성으로 이전코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9월 탁지부는 마쓰다와 용산전환국 건립 계약을 맺고 10월에 현재의 용산구 원효로에 총 공사비 25만 원으로 용산전환국 건립 공사를 착공하였다. 이 공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연되다가 1900년 5월에 비로소 시운전을 하고 8월에 인천전환국의 조폐 시설을 용산으로 옮겨 9월 10일부터 백동화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1901년 6월 1일에는 고종 황제가 하사한 마제 은 50개를 소재로 용해와 압연 시험을 성공리에 마치고 은화 제조를 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우표 인쇄를 위해 설치된 농상공부 인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폐 제조에 필요한 제지소와 인쇄소도 갖추었다. 용산전환국에서는 1901년 2월에 공포된 「화폐조례」에 의거 화폐를 제조하였는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뒷면의 도안이 종래의 쌍룡에서 독수리로 바뀌었으며 독수리의 가슴에는 8괘로 둘러싸인 태극장이 그려져 있었다. 1901년 6월부터 9월까지 제조된 독수리 도안의 반환(半圜) 은화는 궁정에 납입되었으며, 1901년과 1902년중 약 90만 환 정도의 반환 은화가 제조되었으나 시중에 발행되지 못하고 러일전쟁 중 오사카로 보내져서 신화폐로 개조되었다. 용산전환국에서도 백동화가 집중적으로 제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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