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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왼쪽에는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영녕전의 건립은 정종의 부묘 때 논의되었다. 세종 3년에 공정왕이 승하하자, 부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4대봉사(四代奉祀)는 천하 공통이었다. 태조는 조선의 시조이므로 불천위(不遷位)였으며, 친진(親盡)된 5대 신위는 목조였다. 태종과 세종 등은 논의 끝에, 목조의 신주를 체천(遞遷)하되, 그를 모실 별묘(別廟)를 건립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는 중국 남송 때 건립한 송 태조의 사조전(四祖殿)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영녕전이다. | 종묘의 왼쪽에는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영녕전의 건립은 정종의 부묘 때 논의되었다. 세종 3년에 공정왕이 승하하자, 부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4대봉사(四代奉祀)는 천하 공통이었다. 태조는 조선의 시조이므로 불천위(不遷位)였으며, 친진(親盡)된 5대 신위는 목조였다. 태종과 세종 등은 논의 끝에, 목조의 신주를 체천(遞遷)하되, 그를 모실 별묘(別廟)를 건립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는 중국 남송 때 건립한 송 태조의 사조전(四祖殿)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영녕전이다. | ||
영녕전의 구조는 조실(祧室)의 넓고 좁은 것을 일체 종묘의 제도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참찬 허조가 종묘의 오실이 좁아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이 구조대로 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세종은 그의 말을 옳다 하고 상왕에게 아뢰도록 하였으나, 태종은 태조로부터 네 임금에 전하여 내려온 이 종묘 제도를 고쳐 지을 수 없다면서, 이 제도에 의거하여 영건하도록 하였다. 그 명에 따라 예조에서는 여러 제도를 검토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별묘는 정전 네 칸을 세우고, 동·서로 각각 협실 한 칸씩을 지으며, 그 나머지 담이나 섬돌 같은 것은 종묘와 같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따라서 최초의 영녕전은 종묘와 그 규모가 같게 건립되었다. 그 구조는 태조의 사대조를 모시는 정전 4칸과 좌우의 협실 각 1칸씩이었다. | 영녕전의 구조는 조실(祧室)의 넓고 좁은 것을 일체 종묘의 제도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참찬 허조가 종묘의 오실이 좁아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이 구조대로 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세종은 그의 말을 옳다 하고 상왕에게 아뢰도록 하였으나, 태종은 태조로부터 네 임금에 전하여 내려온 이 종묘 제도를 고쳐 지을 수 없다면서, 이 제도에 의거하여 영건하도록 하였다. 그 명에 따라 예조에서는 여러 제도를 검토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별묘는 정전 네 칸을 세우고, 동·서로 각각 협실 한 칸씩을 지으며, 그 나머지 담이나 섬돌 같은 것은 종묘와 같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따라서 최초의 영녕전은 종묘와 그 규모가 같게 건립되었다. 그 구조는 태조의 사대조를 모시는 정전 4칸과 좌우의 협실 각 1칸씩이었다. | ||
− | 그런데 영녕전의 사조전으로서의 기능은 성종을 종묘에 부묘할 때에 공정왕을 영녕전의 협실로 조천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영녕전은 사조전과 5대 이상의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인 조묘(祧廟)가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 + | 그런데 영녕전의 사조전으로서의 기능은 성종을 종묘에 부묘할 때에 공정왕을 영녕전의 협실로 조천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영녕전은 사조전과 5대 이상의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인 조묘(祧廟)가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친진되었어도 세실로 지정되면 조천하지 않았지만, 체천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신주를 왕릉 근처에 묻지 않고 영원히 영녕전에 봉안하였으니, 영녕전은 또 하나의 불천위 사당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종 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서는 영녕전에서의 제사를 춘추로 맹월상순에 지내도록 규정하였다. 영녕전이 건립된 초기의 제사 규정은 별도로 제정되지 않고 세종실록 「오례」에도 실리지 않았다. 세종은 조천한 묘에는 다만 봄·가을의 대향에만 그 생뢰(牲牢)와 제품(祭品)을 종묘에 견주어 하도록 하였다가, 그 이후 사조전 양 옆의 협실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묘보다 한 등급 낮춘 예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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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9일 (수) 14:30 판
목차
종묘제도의 시행 》 새로운 의미의 국가사당 영녕전
Story
종묘의 왼쪽에는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영녕전의 건립은 정종의 부묘 때 논의되었다. 세종 3년에 공정왕이 승하하자, 부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4대봉사(四代奉祀)는 천하 공통이었다. 태조는 조선의 시조이므로 불천위(不遷位)였으며, 친진(親盡)된 5대 신위는 목조였다. 태종과 세종 등은 논의 끝에, 목조의 신주를 체천(遞遷)하되, 그를 모실 별묘(別廟)를 건립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는 중국 남송 때 건립한 송 태조의 사조전(四祖殿)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종묘의 서쪽에 별묘를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영녕전이다. 영녕전의 구조는 조실(祧室)의 넓고 좁은 것을 일체 종묘의 제도에 의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참찬 허조가 종묘의 오실이 좁아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데 이 구조대로 할 필요가 있냐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세종은 그의 말을 옳다 하고 상왕에게 아뢰도록 하였으나, 태종은 태조로부터 네 임금에 전하여 내려온 이 종묘 제도를 고쳐 지을 수 없다면서, 이 제도에 의거하여 영건하도록 하였다. 그 명에 따라 예조에서는 여러 제도를 검토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별묘는 정전 네 칸을 세우고, 동·서로 각각 협실 한 칸씩을 지으며, 그 나머지 담이나 섬돌 같은 것은 종묘와 같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따라서 최초의 영녕전은 종묘와 그 규모가 같게 건립되었다. 그 구조는 태조의 사대조를 모시는 정전 4칸과 좌우의 협실 각 1칸씩이었다. 그런데 영녕전의 사조전으로서의 기능은 성종을 종묘에 부묘할 때에 공정왕을 영녕전의 협실로 조천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영녕전은 사조전과 5대 이상의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인 조묘(祧廟)가 결합된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친진되었어도 세실로 지정되면 조천하지 않았지만, 체천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신주를 왕릉 근처에 묻지 않고 영원히 영녕전에 봉안하였으니, 영녕전은 또 하나의 불천위 사당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종 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에서는 영녕전에서의 제사를 춘추로 맹월상순에 지내도록 규정하였다. 영녕전이 건립된 초기의 제사 규정은 별도로 제정되지 않고 세종실록 「오례」에도 실리지 않았다. 세종은 조천한 묘에는 다만 봄·가을의 대향에만 그 생뢰(牲牢)와 제품(祭品)을 종묘에 견주어 하도록 하였다가, 그 이후 사조전 양 옆의 협실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묘보다 한 등급 낮춘 예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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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3-19D | Story | Episode | 새로운 의미의 국가사당 영녕전 | 새로운 의미의 국가사당 영녕전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3-19D | 2022:임민혁 |
Contextual Relations
그렇다면 조묘에서의 협제祫祭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협제는 세종실록오례에는 수록되었다가 국조오례의에서 빠졌다. ‘협祫’은 본래 ‘합合’의 뜻이다.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제사인데, 조묘에 모셔진 신위들을 모두 내와 태조실에 모셔놓고 지내는 제사이다. 이 제사는 3년상의 마지막 절차인 부묘례祔廟禮를 거행할 때 모든 신위를 태조에게 합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3년에 한 번 거행하는 협제는 설문해자에서 ‘친소원근親疏遠近의 선조들을 크게 합쳐서 제사한다’고 하였다. 춘추공양전에서는 ‘큰 협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합제合祭이다. 합제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훼철된 사당의 신주를 태조太祖에 진설하고, 훼철되지 않은 사당의 신주도 모두 태조에 올려 합식合食하니, 5년마다 두 번 올리는 성대한 제사[殷祭]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협제는 훼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신주를 태조실에 모시고 지내는 제사이다. 훼철이라는 것은 4대가 지나서 친진親盡되었음을 의미한다. 예기 「왕제」의 소에 의하면, ‘이 협제는 시조의 사당에서 제사하는 것으로, 훼철한 사당의 신주와 훼철하지 않은 사당의 신주 모두 시조 사당 안에 모신다. 시조 신주는 서방에서 동면하고 시조의 아들은 소昭가 되어 북방에서 남면하며 시조의 손자는 목穆이 되어 남방에서 북면한다. 이로부터 이하도 모두 그러하며, 서쪽부터 윗자리가 된다’고 하였다. 시조인 태조는 남면하는 것이 아니라, 서쪽에서 동향하며, 그 좌우로 자손이 소목으로 나뉘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소목제는 종묘의 5묘에 적용된 적이 있었던가? 실록을 보면, 협제가 부묘 때 행하는 제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祔’는 합사合祀 곧 합하여 제사한다는 글자이다. 새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이미 모셔진 선조들과 더불어 장차 함께 제사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생의례에 있어서의 통합을 의미하며, 사후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있을 때처럼 합식合食을 통해 그 경사를 함께 모여서 누리게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천자와 제후가 상喪이 끝나서 협제祫祭하여 은제殷祭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협이라는 것은 선조先祖의 신神을 합合하여 향사하므로 조천祧遷한 신주도 역시 참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을 때 경사가 모이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협식祫食의 예를 갖춘 것이니, 삶을 인연하여 죽음을 이룬 것입니다.” 따라서 협제는 길제吉祭이다. 새로 즉위한 임금의 입장에서도 새 신주가 부묘되어 조상에게 의탁하고 열성列聖들이 함께 흠향하게 된 사실은 막대한 경사였다. 주관周官 「대종백大宗伯」과 시경詩經 은송殷頌의 주注에, ‘노례魯禮에 3년상이 끝나면 태조에게 협제祫祭한다’고 하였다. 협祫을 부祔로 주석한 것이다. 이것은 새 신주를 조상의 신주에 합하고 비로소 체협禘祫의 길제吉祭를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종 15년에 종묘친협의宗廟親祫儀와 섭사의攝事儀가 상정되었으나, 조선에서는 협제를 거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논의 끝에, 세종은 조천한 묘에는 다만 봄·가을의 대향에만 그 생뢰牲牢와 제품祭品을 종묘에 견주어 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그 이후 사조전 양 옆의 협실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묘보다 한 등급 낮춘 예제를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왕을 부묘할 때 예조판서 허조가 아뢴 내용 중에서, ‘송나라 영종寧宗은 따로 사조四祖의 전殿을 태묘 대전大殿의 서쪽에 세워서, 희조僖祖·순조順祖·익조翼祖·선조宣祖 등 추존한 임금의 신주를 조천하여 봉안하고, 첫 겨울 협제祫祭를 지낼 때에 먼저 사조전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해마다 예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조전은 곧 조묘이며, 이 조묘에서는 협제와 함께 매년 정기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허조는 자신의 견해를 부연하여 설명하였다.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따로 태묘의 서쪽에 묘실을 세우고 조천된 할아버지의 제사를 받든다면, 옛적에 ‘궁묘宮廟의 대수가 멀어지면 헐어내는 일은 있어도 세울 수는 없다’는 뜻에 맞지 않고, 또 9묘廟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묘를 세우고 추존한 시조를 제사지낸다는 것은 곧 체제禘祭로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의례경전통해속에 이르기를, ‘예에 천자가 아니면 체제를 지내지 못한다. 천자는 그 할아버지를 나은 이에게 체제를 지내고 시조를 배향配享하는 것이며, 제후는 그 시조에만 한한다’ 하였습니다.’ 이 허조의 부연설명은 두 가지의 우려되는 점을 제기하였다. 하나는 궁묘가 친진이 되었으면 헐어내는 것이 원칙이라는 전제 아래, 조묘를 세워 사조전을 마련한다면 종묘의 오묘와 합쳐서 구묘가 되니, 이는 천자구묘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존한 시조인 목조를 별묘에 모시고 제사지내는 것은 천자의 예인 체제로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n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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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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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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