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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ART001831284 || 논문 || 김영두,「난언과 은거, 세조 정권에 저항하는 대항 기억의 형성」, 『사학연구』 112, 한국사학회, 2013.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31284 | | KCI:ART001831284 || 논문 || 김영두,「난언과 은거, 세조 정권에 저항하는 대항 기억의 형성」, 『사학연구』 112, 한국사학회, 2013.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312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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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ART001779463 || 논문 || 김영두,「실록 편찬에 나타난 세조 정권의 정당성 추구」, 『한국사학사학보』 27, 한국사학사학회, 2013. | + | | KCI:ART001779463 || 논문 || 김영두,「실록 편찬에 나타난 세조 정권의 정당성 추구」, 『한국사학사학보』 27, 한국사학사학회, 2013.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794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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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ART001951041 || 논문 || 김경수,「『세조실록』의 편찬과 세조 정권」, 『한국사학사학보』 30, 한국사학사학회, 2014.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51041 | + | | KCI:ART001951041 || 논문 || 김경수,「『세조실록』의 편찬과 세조 정권」, 『한국사학사학보』 30, 한국사학사학회, 2014.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51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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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CI:ART001906038 || 논문 || 김경수,「세조의 집권과 권력 변동」, 『백산학보』 99, 백산학회, 2014.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06038 | + | | KCI:ART001906038 || 논문 || 김경수,「세조의 집권과 권력 변동」, 『백산학보』 99, 백산학회, 2014.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06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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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ART002427810 || 논문 || 김순남,「조선 세조대 훈신의 불경」, 『남도문화연구』 35,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8.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27810 | | KCI:ART002427810 || 논문 || 김순남,「조선 세조대 훈신의 불경」, 『남도문화연구』 35,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8.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27810 |
2022년 10월 17일 (월) 22:06 판
목차
조선 왕실부터 명 황실까지, 한확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 》 한확이 종묘 배향공신이 된 배경
Story
배향공신이란 고려, 조선 시대 국왕의 묘정에 배향된 공신을 말한다.[1]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은 보통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왕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기 보름 내지 한 달 전쯤 결정되었다. 배향 대상자는 선왕이 살아 있었을 때 보좌하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관료들이었다. 만약 꼭 배향해야 할 사람인데도 선왕보다 오래 살 경우에는 사후에 논의하여 배향하기도 하였다. [2] 한편 종묘배향공신은 자신이 보좌한 왕의 신주가 종묘에서 나갈 때 같이 나가야 한다. 왕의 신주는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졌지만, 배향공신의 신주는 후손에게 주어져 불태우도록 하였다. 다만 종묘에 모셔진 왕이 불후의 공덕이 있는 불천위(不遷位)가 되면 배향공신의 신주 역시 옮기지 않았다. 이에 한확의 신주 역시 정전에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확은 어떤 이유로 배향공신으로 선정되었을까.
한확이 세조의 배향공신이 된 데에는 '계유정난'[3]이라는 사건이 핵심적인 영향을 끼쳤다. 1453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조선 세조)은 왕위 찬탈을 목적으로 자신의 측근과 모의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 대신과 종친인 안평대군을 살해, 제거 하였다. 그리고 도리어 그들이 반역을 도모했고, 자신이 이 역모를 미연에 탐지하여 국가의 위난을 평정했다고 주장하며 단종에게 이 거사에 가담, 협력한 사람에게 공신의 책록을 내릴 것을 요청하였다. 단종이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정난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려 표창하였다. 그때 공신은 모두 43명으로 1등은 수양대군, 한확, 권람, 한명회, 최항, 정인지, 박종우, 김효성, 이사철, 이계전, 박중손, 홍달손, 이렇게 12명이다. 이 중 한확, 권람, 한명회가 세조대왕의 공신으로서 종묘에 배향되었다.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는 <파천무>(KBS2TV, 1990), <한명회>(1994, KBS2TV), <왕과 비>(KBS1TV, 1998), <공주의 남자>(KBS2TV, 2011)가 있고, 영화로는 <관상>(한재림 감독, 2013)이 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id | class | groupName | partName | label | hangeul | hanja | english | infoUrl | iconUrl | n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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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3-18C | Story | Episode | 한확이 종묘 배향공신이 된 배경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3-18C | 2022:이한나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type | resource | title | description/caption | 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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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계유정난(癸酉靖難)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220 | |
참고 | 동아비즈니스리뷰 | 탁월한 실력의 신숙주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2014-09, 김준태) | https://dbr.donga.com/article/view/1201/article_no/6652/ac/magazine |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Story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