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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Story==
1678년부터 주조·유통되기 시작하여 조선 말기까지 전국적으로 통용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화폐로 상평통보가 있었다.
 
*대동은전
 
  
이후 외국과의 통상 거래에 있어 동전 사용의 불편이 커지면서 금·은전 사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조정은 1882년 10월 3종의 은전 즉 대동일전(大東一錢), 대동이전(大東二錢), 대동삼전(大東三錢)을 발행하였다. 은전 뒷면 중앙에는 작은 원이 그려져 있으며 그 속에 호조에서 만들었다는 표시로 “호(戶)”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동은전은 가운데에 구멍을 뚫지 않은 최초의 서양식 주화로서 근대적인 화폐의 형태를 갖추어 주조되었지만, 화폐조례와 같은 근대적인 법적 근거는 제정되지 않았다. 대동은전이 주조·유통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는 은화와 동화가 같이 유통되게 되었다.그러나 대동은전은 발행되자마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Gresham)의 법칙’48)에 따라 부자들의 수중으로 퇴장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시중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또한 대동은전의 소재로 사용된 마제은의 가격이 올라 주조 원가가 상승한 데다 마제은의 구입도 여의치 않자 1883년 6월에 주조가 정지되었다.(52쪽)
 
 
*당오전
 
당오전(當五錢)은 극도에 달한 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통리기무아문의 주청에 따라 민태호(閔台鎬, 1834~1884년)의 관리하에 1883년 2월에 발행되었다. 당오전이란 1매의 가치가 종래 주조·유통되어 온
 
1문전 상평통보의 5매에 해당한다고 하여 그런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당오전의 가치가 폭락하자 조정은 1889년 3월 당오전 주조를 중지하였다. 이번에는 주전 원료인 구리·납 산지와 가까운 평양에 전환국 분소를 설치하고 민씨 척족인 평안 감사 민병석의 관리하에 당일전을 대량으로 주조하게 하였다. ‘평양전’이라 불리던 이 당일전은 기존의 당일전과 비교할 때 중량이 3분의 1도 안 될 뿐 아니라 금속 성분도 극히 조악하여 전체 주조액의 약 16%에 해당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107) ‘평양전’은 발행되자마자 원산항과 경인 지방·남부 지방 등에 유입되면서 당오전·당일전 시세를 더욱 폭락시켰다.
 
  
 
*경성전환국 설립(1환은화, 5문 적동화)
 
*경성전환국 설립(1환은화, 5문 적동화)

2022년 11월 17일 (목) 22:56 판


개항기의 신식 화폐

Story

  • 경성전환국 설립(1환은화, 5문 적동화)

최초의 근대적 상설 조폐 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은 1883년 7월에 설립되 었다.전환국 설립 이전에는 그때그때의 편의에 따라 임시로 설치한 주전소 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으나 당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상설 조폐 기관이 필 요하게 되었다. 첫째, 우리나라의 화폐는 가치가 불안정하고 운송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유통량도 부족하여 개항 이후 여러 나라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화폐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여러 선진국의 화폐 제도를 참고하여 근대적 화폐 제도를 도입하고 신식 화폐를 주조하고자 하였다. 이 를 위해서는 종래의 임시로 설치된 주전소와는 달리 규모가 크고 정밀한 조폐 설비를 수용할 수 있는 독립된 상설 조폐 기관의 설치가 필수적이었 다. 둘째, 다원화된 화폐 주조 사업의 관리 체계를 일원화하여 조정이 직접 주조 사업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중앙 집권적이고도 독점적으로 주화를 제 조·발행함으로써 화폐 정책을 보다 안정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개항 이후 국가 재정이 한층 더 궁핍해지고 있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량의 화폐를 지속적으로 주조해야 할 형편이었다.(54쪽) 당시 정부는 독일에서 신식 조폐기기를 들여오는 등 신식 주화 발행에 열의를 보였으나 ‘개국 497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5문과 10문 적동화, 1환 은화를 소수 발행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1886년(고종 23년) 조선 왕조는 외국과의 통상에 없어서는 안 될 근대 화폐 제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묄렌도르프의 건의에 따라 거액의 외국 자본으로 독일에서 조폐기기를 수입했다. 압인기에 의해 제조된 최초의 주화는 1888년 ‘개국 497년’이란 연호가 표시된 1환 은화와 10문, 5문 적동화였다. 이 주화들의 앞면 상단에는 태극장을 넣었고, 좌우에는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오얏나무 가지를 교차시켰다. 뒷면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쌍룡과 조선 왕조의 개국년기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때 발행된 화폐는 시주(詩鑄) 화폐의 구실을 했을 뿐 일반에서는 거의 통용되지 못했다. 또한 금, 은의 보유량이 절대 부족했고, 조폐 이익도 그다지 크지 않아서 최초로 발행된 신식 화폐는 얼마 가지 않아 주조가 중단되었다. 화폐 제조가 중단됨으로 인해 압인기를 비롯한 조폐기기들 역시 별다른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성전환국 (한국의 박물관: 화폐, 2001. 6. 28., 한국박물관연구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83221&cid=42962&categoryId=44338

  • 신식화폐조례의 제정 시도(1냥은화, 5냥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은본위하폐제 도입을 위해.

1891년에 은본위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첫 시도로서 일본 제58은행장 오오미와 죠우베(大三輪長兵衛)가 제안하고 전환국 방판(幇判) 안경수(安駉 壽, ?~1900년)와 당시의 주일 공사 김가진(金嘉鎭, 1846~1922년)이 주도하 여 「신식화폐조례(新式貨幣條例)」가 입안되었다. 조례에 따르면 본위 화폐를 5냥 은화와 1냥 은화 둘로 정하되, 전자는 외 국인 전용으로 사용하고, 후자는 내국인의 거래에 사용토록 하였다. 화폐 액면간 교환 비율은 1냥을 10전, 1전을 10푼으로 하는 종래의 10진법이 계 승되었다. 이 밖에 화폐 발행권을 전환국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 조례에 의거하여 1892년 12월에 1냥 은화, 5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가 인천전환국에서 제조되었 다. 그러나 이 조례는 청나라를 비롯한 외국의 부당한 간섭과 국내 수구파의 반대로 공포되지 못하고 결국 하나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아울러 이를 근거로 제조된 근대 화폐들도 발행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 신식화폐발행장정 공포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보다 능률적으로 수행하는데 소요되는 자국화폐의 한국 진출을 합법화시킬 목적으로 은본위제의 채용을 골자로 하는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조선정부로 하여금 제정, 실시하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갑오개혁 때에 발표된「신식화폐발행장정」은 불과 열흘밖에 안 되는 극히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1894년 7월 11일에 공포된 조례로서 1891년의 「신식화폐조례」를 바 탕으로 하여 외국의 화폐라도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이면 국내 에서 통용될 수 있다는 조항을 덧붙였다. 장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폐의 종류는 은, 백동, 적동, 황동의 4종으로 한다. 둘째, 최저 단위는 푼으로 하고 10푼을 1전으로 하며 10전을 1냥으로 한 다. 셋째, 1푼은 황동, 5푼은 적동, 2전 5푼은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한다. 넷째, 5냥 은화를 본위 화폐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조 화폐로 한다. 다섯째, 신․구 화폐는 병행 통용하되 그 교환 비율은 황동 1푼=구전 1매 (枚), 적동 5푼=구전 5매, 백동 2전 5푼=구전 25매, 은 1냥=구전 100매, 은 5냥=구전 500매로 한다. 여섯째, 신식 화폐를 많이 제조하기 전에 외국 화폐를 혼용하도록 하되 본국 화폐와 동질, 동량, 동가인 것만 통용하도록 한다. 이로써 은화를 본위 화폐로, 동화와 엽전을 보조 화폐로 삼는 근대적 화 폐 제도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 로 본위 화폐인 5냥 은화를 다량 제조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인천전환국은 보조 화폐 중 제조 차익이 큰 2전 5푼 백동화와 5푼 적동화의 제조에 치중 하였다. 한편 「신식화폐발행장정」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막 대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자국 화폐의 조선 진출을 합법화한 것으로 화폐 개혁에 필요한 사전 준비도 없이 공포된 것이었다.

  • 용산전환국의 설립

대한제국 정부는 화폐 수요의 급증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차관을 받아 인천전환국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확장 공사는 건축과 기계 증설에 관 계되는 일체의 업무를 다시 일본인 마쓰다(增田)에게 위임하여 1898년 8월 에 착공되었다. 그러나 확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전환국을 용 산으로 이전하라는 고종 황제의 명에 따라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고종이 이와 같은 명을 내린 이유는 경인선이 곧 개통될 예정이어서 경 성의 교통․수송상 불편이 해소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인데, 보다 근본 적으로는 대한제국의 화폐권을 침해하려는 일본 측에 대항하여 전환국을 경성으로 이전코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8년 9월 탁지부는 마쓰다와 용산전환국 건립 계약을 맺고 10월에 현재 의 용산구 원효로에 총 공사비 25만 원으로 용산전환국 건립 공사를 착공하 였다. 이 공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지연되다가 1900년 5월에 비로소 시운 전을 하고 8월에 인천전환국의 조폐 시설을 용산으로 옮겨 9월 10일부터 백 동화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1901년 6월 1일에는 고종 황제가 하사한 마제 은 50개를 소재로 용해와 압연 시험을 성공리에 마치고 은화 제조를 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우표 인쇄를 위해 설치된 농상공부 인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폐 제조에 필요한 제지소와 인쇄소도 갖추었다. 용산전환국에서는 1901년 2월에 공포된 「화폐조례」에 의거 화폐를 제 조하였는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뒷면의 도안이 종래의 쌍룡에서 독수리 로 바뀌었으며 독수리의 가슴에는 8괘로 둘러싸인 태극장이 그려져 있었다. 1901년 6월부터 9월까지 제조된 독수리 도안의 반환(半圜) 은화는 궁정에 납입되었으며, 1901년과 1902년중 약 90만 환 정도의 반환 은화가 제조되었 으나 시중에 발행되지 못하고 러일전쟁 중 오사카로 보내져서 신화폐로 개조되었다. 용산전환국에서도 백동화가 집중적으로 제조되었다.

  • 금본위제도의 도입 시도 :화폐조례의 제정

1890년대 초 이미 세계 주요국이 금본위 제도로 이행하고 있었고 러시아 와 일본도 각각 1893년과 1897년에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세계 적 조류에 따라 대한제국도 1898년 7월 28일에 금화를 본위 화폐로 하고 은화를 보조 화폐로 하기로 결정하였음에도 1901년 2월에야 비로소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는 「화폐조례(貨幣條例)」가 제정·공포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 은화의 통용을 억제하는 반면, 러시아 화폐의 체제를 본뜬 각종 주화가 주조되었다. 그러나 1901년의 「화폐조례」는 일본 세력이 강화됨에 따라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이 조례는 당시 탁지부 고문이었던 러시아 출신 알렉시에프(K. Alexieff) 의 영향을 받은 친러파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서 주된 목적은 금본위 제도 로의 이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각한 백동화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고 일본 각인은화의 통용을 금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화폐조례」가 발표됨 과 동시에 일본 1엔 은화의 유통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이 조례는 일본의 화폐법과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일본의 화폐 단위인 엔(圓)과 같이 순금 2푼 (750mg)을 1환으로 하였으며 화폐의 종류도 유사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재정 궁핍으로 금화를 제조하지 못하였고 이 조 례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됨에 따라 「중앙은행조례(中央銀行條 例)」, 「태환금권조례(兌換金券條例)」와 함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하 나의 시도로 끝나고 말았다.

  •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조례」의 공포

1901년 「화폐조례」의 제정으로 대한제국의 화폐 제도가 은본위 제도에 서 금본위 제도로 이행됨에 따라 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화폐와 금융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설립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1902 년에 「중앙은행조례」와 「태환금권조례」가 제정되어 이듬해 3월 24일 칙령 제8호로 공포되었다. 「중앙은행조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앙은행은 액면 가격 50환인 주식 6만 주를 발행하여 자본금 3백 만 환의 주식회사로 설립토록 한다. 둘째, 주식은 기명식으로서 대한제국 사람만 보유할 수 있다. 셋째, 영업 연한은 30년이나 주주의 승인에 의하여 연장이 가능하다. 넷째, 태환은행권의 발행은 중앙은행이 독점한다. 「태환금권조례」에 따르면 중앙은행은 5종(1환, 5환, 10환, 50환, 100환) 의 금화 태환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으며, 그 발행 준비는 일부정화준비제 도(一部正貨準備制度)60)로서 정화준비(正貨準備)61)와 보증준비(保證準備)62)에 의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8월 23일에는 탁지부 대신 심상훈이 중앙은행 총재, 내장원경(內 藏院卿)63) 이용익(李容翊, 1854~1907년)이 부총재를 겸임하게 되었다. 심상 훈과 이용익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중앙은행의 설립과 동시에 1901년에 제정된 「화폐조례」를 시행함으로써 화폐 제도와 금융 제도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에 대해 은행의 신용이란 쉽게 쌓이는 것이 아니어서 신생 중앙은행에 국고금의 취급을 맡기는 것이 어려우며 해관세의 취급은 일본 제일은행이 묄렌도르프와 계약하여 취급하 고 있는 만큼 대한제국 정부 임의로 바꿀 수 없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하였 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그 달 25일 중앙은행 의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던 이용익이 일본으로 납치됨으로써 「중앙은행조 례」와 「태환금권조례」의 시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 화폐정리사업

1904년부터 시작된 구화폐의 정리사업. 화폐정리, 즉 화폐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있던 구백동화의 정리작업이었다.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유통되고 있던 구백동화의 유통량은 전환국 주조발행액 약 1700만원(元), 기타 사주(私鑄)나 위조된 것이 600만원으로, 도합 2300만원으로서, 통화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화폐정리의 성공여부는 구백동화의 정리 여하에 달려 있었다.이에 한국정부는 1905년 6월 초에 탁지부령(度支部令)으로 ‘구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및 ‘구백동화 교환 처리순서’를 공포하고, 7월 초부터는 구백동화의 교환이 시작되었다.1908년 1월 탁지부령으로써 그 해 12월 말까지는 구백동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기한이 끝난 뒤 6개월 동안에 한해 그것을 공용(公用)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였다.정부당국은 각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을 통해 구화를 매수하고, 또 상인들데게 교환조합을 결성시키고 수수료를 지급, 구화폐를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그러나 정부당국의 화폐정리에 대한 취지가 각 지방까지 충분히 주지, 선전되지 못해기 때문에 1909년 5월에 칙령으로써 구화폐의 공납 기한을 12월 말까지 연기하였다. 구백동화 교환을 개시해 기한이 끝날 때까지 회수된 총액수는 960만 8636환 64전이었다.상평통보[엽전]는 1678년(숙종 4) 이래 법화로 통용된 전근대적 화폐이다. 그것은 구백동화와는 달리 급격히 정리하려 하지 않고 1905년 7월 탁지부대신령으로 국고수납을 통해 환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1901년 이래로 다이이치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이 화폐정리과정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살펴본다. 1905년의 「화폐조례」에서는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또 다이이치은행은 한국의 중앙금융기관으로서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은 공사 유통거래에서의 통용이 공인되었다.1909년 11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업무 일체가 인계되어 은행권도 계승되었다. 한국은행권이 발행될 때까지 다이이치은행권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이이치은행권은 시장의 유통계에서 경화(硬貨)의 유통량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던 것 같다.이상과 같이, 한국정부가 일본세력의 적극 개입하에 추진한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는 창설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근대화폐제도 창설로 말미암아 농촌의 자연경제는 분해가 더욱 촉진되어 농민은 토지와 생활재료 및 노동수단으로부터 축출되고,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추방당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1904년 이래로 실시된 화폐정리, 즉 화폐제도 개혁과정에서 초래된 특이한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우리 나라 상인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나타나는 금융상의 핍박에 허덕이게 되었던 것이다.특히, 서울 종로의 상인들 사이에는 금융상의 혼란, 즉 전황(錢荒)이 일어나 경제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상인이 상점문을 닫고 도망가거나 혹은 극약을 먹고 자살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다.한편, 정부당국은 구백동화의 환수과정에서 품질을 갑·을·병으로 구분해 갑종과 을종의 것은 매수하고, 품질이 나쁜 병종의 것은 매수하지 않았다. 당시 관주(官鑄) 백동화도 그러하였지만, 사주(私鑄) 또는 위조된 백동화의 수량은 적지 않았으므로, 정부당국이 품질이 나쁜 백동화에 대해 무가치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 가운데에는 도산하거나 탕업(蕩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화폐정리사업으로 근대화폐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고, 또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변화를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침략의 기반을 다지려는 일제의 적극적인 간섭 하에 추진되어 한국정부의 화폐에 대한 지배권이 사실상 일제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폐정리사업(貨幣整理事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4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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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1-R0-02 E2021-R0-02B hasPart 신식화폐조례의 제정 시도
S2021-R0-02 E2021-R0-02C hasPart 근대적 화폐 제도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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