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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가 조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선조 대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명(明)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의 울산성 전투에서 전투를 치루다 부상을 입은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숭례문 밖 가옥 한 채를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중국에서 가져온 관우상을 집에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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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가 조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선조 대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명(明)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의 울산성 전투에서 전투를 치루다 부상을 입은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이 숭례문 밖 가옥 한 채를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중국에서 가져온 관우상을 집에 모셨다고 한다. 이 관우상이 있는 작은 집은 조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고, 평소 관우신을 신성시 여겼던 중국인들에 의해 점점 사당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충의(忠義)와 무(武)를 상징하는 무안왕(武安王)이었기에 전쟁 중이었던 명나라 장수들에게 관우는 특히나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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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시작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점차 국가적인 차원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조선 영토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는 사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사신을 통해 건립비용을 직접 지원하며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관우의 사당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토록 하였다. 결국 관우 사당은 남대문(숭례문) 밖 인근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곧 남관왕묘(남묘)라고 불리우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관왕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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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조선에게 또 다른 관왕묘 건립을 요구하였고 이 관왕묘 역시 처음에는 남대문 인근에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선조의 강력한 요구로 동대문(흥인문, 지금의 흥인지문) 밖 인근에 두 번째 관왕묘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관왕묘가 바로 현재 동묘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동묘, 즉 동관왕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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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지원해준 명나라의 요구였던 점과 동시에 사대의 예를 중요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조선 영토 안에 관왕묘가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왕묘와 무안왕(武安王)에 대한 인식은 조선에게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국의 일개 장수가 모티브가 된 신이었기에 어쩌면 부정적인 반응은 당연했을 것이다. 또한 선조는 일국의 왕이었지만 관왕묘에 대한 참례(參禮)를 하도록 요구받아 이에 관해서는 조정 안에서도 많은 논의가 오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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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며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명나라 역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게 되면서 조선에 설치된 관왕묘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선조 이후의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에 대한 관리와 보수 작업만 명령하였을 뿐, 직접 관왕묘에 행차하여 참례(參禮)를 하는 모습은 당분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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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4일 (토) 03:16 기준 최신판

관왕묘를 중시한 조선의 왕들 》 임진왜란과 선조, 그리고 관왕묘의 첫 등장

Story

관왕묘가 조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선조 대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명(明)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의 울산성 전투에서 전투를 치루다 부상을 입은 명나라 유격장 진인(陳寅)이 숭례문 밖 가옥 한 채를 얻어 치료를 받던 중 중국에서 가져온 관우상을 집에 모셨다고 한다. 이 관우상이 있는 작은 집은 조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고, 평소 관우신을 신성시 여겼던 중국인들에 의해 점점 사당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충의(忠義)와 무(武)를 상징하는 무안왕(武安王)이었기에 전쟁 중이었던 명나라 장수들에게 관우는 특히나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시작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점차 국가적인 차원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조선 영토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는 사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며, 사신을 통해 건립비용을 직접 지원하며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관우의 사당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토록 하였다. 결국 관우 사당은 남대문(숭례문) 밖 인근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곧 남관왕묘(남묘)라고 불리우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관왕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조선에게 또 다른 관왕묘 건립을 요구하였고 이 관왕묘 역시 처음에는 남대문 인근에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선조의 강력한 요구로 동대문(흥인문, 지금의 흥인지문) 밖 인근에 두 번째 관왕묘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관왕묘가 바로 현재 동묘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동묘, 즉 동관왕묘이다.

전쟁을 지원해준 명나라의 요구였던 점과 동시에 사대의 예를 중요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조선 영토 안에 관왕묘가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관왕묘와 무안왕(武安王)에 대한 인식은 조선에게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국의 일개 장수가 모티브가 된 신이었기에 어쩌면 부정적인 반응은 당연했을 것이다. 또한 선조는 일국의 왕이었지만 관왕묘에 대한 참례(參禮)를 하도록 요구받아 이에 관해서는 조정 안에서도 많은 논의가 오가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며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명나라 역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게 되면서 조선에 설치된 관왕묘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선조 이후의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에 대한 관리와 보수 작업만 명령하였을 뿐, 직접 관왕묘에 행차하여 참례(參禮)를 하는 모습은 당분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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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4-03A Story Episode 임진왜란과 선조, 그리고 관왕묘의 첫 등장 임진왜란과 선조, 그리고 관왕묘의 첫 등장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2022-R4-03A 2022:윤종훈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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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2022-R4-03A 조선_선조 isRelatedTo
E2022-R4-03A 동관왕묘 isRelated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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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Data

동관왕묘(동대문 밖 숭인동=현 위치 유지)


남관왕묘(숭례문 밖 중구 도동=현재 위치는 사당동으로 이전)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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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동관왕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987
참고 위키 실록사전 관왕묘(關王廟)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관왕묘(關王廟)
참고 우리역사넷 임진왜란과 관왕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7_0060_0010_0010_0010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왕묘(關王廟)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948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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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lok:kna_13104025_004 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31년 4월 25일:정원이 관왕묘 수축시 물력 조달에 대해 아뢰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104025_004
sillok:kna_13204029_003 고문헌 『선조실록, 선조 32년 4월 29일:관왕묘 설립에 관한 일로 정원에 하교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204029_003
  • id: 인용전거
  •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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