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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일) 14:15 기준 최신판
목차
창덕궁 규장각(奎章閣)과 정조
Story
정조는 즉위한 양력 1776년 월 일(음력 정조 즉위년 3월 10일) 바로 그 다음 날에 창덕궁 후원 북쪽에 ‘규장각(奎章閣)’건물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그 건물의 이름은 임금님이 직접 지은 글을 보관하는 건물이라는 뜻의 어제각(御製閣)이었다. 정조는 어째서 규장각 건립을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로 꼽았을까? 그리고 그 건물을 어제각이라고 부른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어제각이라는 이름만을 두고 본다면 정조가 애초에 규장각을 통치기구로 발전시키려 하였던 징후는 없다. 여기서 규장각이 선대와 현재 국왕의 어제를 보관하는 국왕의 박물관 내지는 기록관에서 출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규장각 제도는 어제(御製)를 존각(尊閣)에 보존하는 송대의 용도각(龍圖閣)이나 천장각(天章閣) 제도에서 연유하며 이는 조선에서 세조 조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건의된 바 있지만 시행되지는 못했고 숙종조에는 종정시(宗正寺)에 소각(小閣)을 세우고 어서한 ‘규장각’세 글자를 게시(揭示)하였다는 이력과도 부합한다. 소박한 의도에서 출발한 규장각은 이후 도서관으로, 학술연구 기관으로 급기야 일성록 등의 출판을 담당하고 초계문신을 교육하는 등 국왕 통치에 부응하는 다목적인 기구로 활용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집현전이 없는 세종을 떠올릴 수 없듯이 정조의 정치에서 규장각을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규장각의 탄생부터 기능 확대를 통해 정조가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관철시켜 나갔는지 그 궤적을 헤아려 본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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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1-06 | Story | Storyline | 창덕궁 규장각(奎章閣)과 정조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S2022-R1-06 | 2022:김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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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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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e: 단행본, 논문, 도록, 자료집
- online resource: KCI, RISS, DBpia, 네이버 학술정보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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