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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908년 8월 27일 ~ 12월 13일】. 독사신론(讀史新論). 1908년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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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20일 (월) 18:12 판
목차
Definition
【1908년 8월 27일 ~ 12월 13일】. 독사신론(讀史新論). 1908년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신채호는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1910년 국권 회복 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 『소년』 1910년 8월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는데, 이따금 표현의 차이 및 삭탈된 부분이 있다.이를 전재하면서 최남선은 “순정사학(純正史學)의 산물로 보아주기는 너무 경솔하고, 그렇다고 순연히 감정의 결정이라고만 하기도 바르지 못한지라……조국의 역사에 대해 가장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참과 옳음을 구해 오래 파묻혔던 빛과 오래 막혔던 소리를 드러내려고……이를 수록하노라.”고 평하였다.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 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완결 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은 ① 단군 시대 ② 부여 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즉, 국사란 국가의 역사로서, 국가가 민족에 의해 성립된 유기체이므로 민족사가 곧 국사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행사한 주족(主族)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 성쇠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을 주족으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부여족이 살았던 만주를 우리나라 영토화하는 동시에, 현실적인 외세의 침략에 대한 자긍 의지를 뚜렷이 하기 위한 것이었다.이에 단군시대부터 발해의 멸망에 이르기까지를 부여족의 활동과 다른 민족과의 교섭 과정으로서 인식하고자 하였다. 단군의 정통이 부여로, 그 다음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 계승되며, 종래에 중시되던 기자·위만·한사군은 부여족의 역사에 부속시켜 서술하였다.따라서, 정통론 사학에서 주장되던 기자조선에서 마한 또는 삼한으로 정통이 계승된 것으로 파악되던 고대사 인식 체계가 뒤집어지게 되었다.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본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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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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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명성황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8297 | |
해설 | 위키백과 | 명성황후 | https://ko.wikipedia.org/wiki/명성황후 | |
해설 | 두산백과 | 명성황후 |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3683 | |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 문화원형백과 > e조선궁중여성 | 명성황후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70841&cid=49236&categoryId=49236 | |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 네이버캐스트 > 인물한국사 | 명성황후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1412&cid=59015&categoryId=59015 | |
참고 | 국가문화유산포털 | 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100460000 | |
참고 | 한국민속대백과 > 한국민속신앙사전 | 인왕산국사당(仁王山國師堂) |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2674 | |
원문 | 디지털 장서각 | 명성황후홍릉비(明成皇后洪陵碑) | http://jsg.aks.ac.kr/dir/view?dataId=ROY_G002%2BJSK%2BKSM-WH.1897.4136-20160515.25316 | |
그림 | 서울신문 | 권오창 화백의 명성황후 영정 | https://img.seoul.co.kr/img/upload/2017/08/14/SSI_20170814154630_O2.jpg |
Bibliography
type | bibliographic index | online resource | 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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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이우진, 「신채호의 민족에 대한 상상과 영웅 양성 - 『독사신론』과 영웅론을 중심으로 -」, 『퇴계학논집』 25, 영남퇴계학연구원, 2019. | KCI | |
논문 | 류시현, 「민족사 서술을 위한 새로운 이론 :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내일을 여는 역사』 75,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19. | KCI | |
논문 | 김기승, 「신채호의 독립운동과 역사인식의 변화」, 『중원문화연구』 15,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10. | ||
논문 | 신용하, 「申采浩의 《讀史新論》의 比較分析-1908년경 市民的 近代民族主義史學의 成立-」, 『丹齋申采浩와 民族史觀』,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1980. | ||
논문 | , 「」, 『』 , , . | KC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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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제3권 역사 - 讀史新論 / 大東帝國史叙言 / 朝鮮上古文化史』,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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