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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25일, [[경운궁중건도감]] 의궤당상 [[이재극|이재극(李載克)]]이 [[조선_고종|고종]]에게  “경운궁(慶運宮) [[대안문|대안문(大安門)]]의 수리를 음력 4월 12일로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이때 고종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치되 아뢴 대로 거행하라”고 함으로써 덕수궁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문|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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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중건도감의궤|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의 [[대한문_상량문|대한문(大漢門) 상량문(上樑文)]]을 보면, “황하가 맑아지는 천재일우의 시운을 맞았으므로 국운이 길이 창대할 것이고, 한양(漢陽)이 억만년 이어갈 터전에 자리하였으니 문 이름으로 특별히 건다”고 하였다. <ref>[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 대한문 상량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ref> [[대한문|대한문(大漢門)]]이라는 이름은 한양(漢陽)을 수도로 하여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하라는 염원을 담은 것임을 알 수 있다.<ref>[http://www.deoksugung.go.kr/board/view?no=533&board_id=FAQ 대한문 명칭에 대하여, 덕수궁소식]</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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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과 함께 환구단은 태어났다. 환구단이 있어야 황제일 수 있으르모 운명을 함께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을 함께 했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915년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총독부가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이 일이 [[배정자|배정자(裵貞子)]]라는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의 내연녀와 관련이 있다는 속설이 돌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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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별건곤』]] 제33집(1933년 7월 1일자)에서  ‘문외한’이란 가명의 필자는 ‘대한문’ 관련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는데, 안(安)자가 계집 녀() 자에 갓쓴 글자이고 양장하고 모자 쓴 여자인 [[배정자]]대궐 출입이 빈번해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쟁이의 말로 인해 대한문으로 고쳤다.”<ref>[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80900001 이기환, "갓 쓴 여자 재수없어"…덕수궁 대안문이 대한문 된 사연, 경향신문 2020-04-08]</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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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이 실각한 [[흥선대원군_이하응|흥선대원군]]의 추종세력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후 1885년에 일본으로 보내졌다. 1887년 [[김옥균]]의 소개로 [[이토_히로부미|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일본의 특급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br/>
 
배정자 이외에도 러시아공사 [[카를_베베르|베베르]]의 부인과 그의 언니 [[앙트와네트_손탁|앙트와네트 손탁]]도 이 시절 대안문을 자주 드나들던, 모자 쓴 양장의 여인들이었다.
 
  
  
대한제국과 함께 탄생한 환구단은 완성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시 한 번 그와 운명을 함께 했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915년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환구단이 대한제국의 상징물이었던 만큼, 일제가 이를 허물고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도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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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4025_002 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경운궁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다]</ref><br/>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1967년에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착공되면서 황궁우를 중심으로 한 환구단 일대가 사적 157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각종 명목으로 문화재 지정 면적이 1,505평에서 1,310평으로, 다시 1,070평으로 축소되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구단 정문, 어재실 등 철도호텔에서 사용되던 부속 시설들이 훼손되거나 방매되었다. 국제관광공사의 『조선호텔처리지(1967)』에 의하면, 정부는 팔각정, 석고단, 환구단 외의 호텔 건물 자체는 일본인이 시공한 건물로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방매된 시설들은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2007년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의 재개발 과정에서 정문이 발견되었고, 음식점인 인수각도 변형되긴 했지만 환구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은 우여곡절 끝에 42년 만인 2009년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이전되었고, 2013년에는 일본식 조경으로 지적받던 잔디와 석등을 제거하는 등 복원 공사를 거쳐 일반에 재개방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1967년에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착공되면서 황궁우를 중심으로 한 환구단 일대가 사적 157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각종 명목으로 문화재 지정 면적이 1,505평에서 1,310평으로, 다시 1,070평으로 축소되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구단 정문, 어재실 등 철도호텔에서 사용되던 부속 시설들이 훼손되거나 방매되었다. 국제관광공사의 『조선호텔처리지(1967)』에 의하면, 정부는 팔각정, 석고단, 환구단 외의 호텔 건물 자체는 일본인이 시공한 건물로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방매된 시설들은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2007년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의 재개발 과정에서 정문이 발견되었고, 음식점인 인수각도 변형되긴 했지만 환구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은 우여곡절 끝에 42년 만인 2009년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이전되었고, 2013년에는 일본식 조경으로 지적받던 잔디와 석등을 제거하는 등 복원 공사를 거쳐 일반에 재개방되었다.

2021년 9월 14일 (화) 23:30 판

환구단을 차지한 조선호텔

Story

대한제국과 함께 환구단은 태어났다. 환구단이 있어야 황제일 수 있으르모 운명을 함께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을 함께 했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다음 해인 1911년 2월에 환구단의 건물과 대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1915년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913년부터는 공진회 관람객들이 숙박할 수 있는 호텔을 환구단 일대에 신축하기 시작했다. 철도 이용객과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서양식 호텔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총독부가 환구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로 한 것은 정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철도호텔의 건설로 핵심 시설인 환구단은 철거되었고, 철거를 면한 부속 건축물들도 1914년 개관한 호텔의 부대시설로 활용되거나 다른 시설로 이전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환구단의 정문은 그대로 호텔의 정문이 되었고, 제사를 위해 황제가 머물던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호텔의 음식점 및 연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1923년에는 석고단이 있던 영역에 총독부립경성도서관(조선총독부도서관)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1927년에 정문인 광선문을 남산에 있던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 그 정문으로 사용했고, 1935년에는 석고각 역시 장충단(奬忠壇) 앞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건축한 박문사(博文寺)의 종루로 활용했다. 훼철을 면한 석고단은 황궁우와 함께 현재까지도 남아 있지만, 원위치에서 벗어나 철도호텔의 후원으로 옮겨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의 등장과 함께 철저히 분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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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1967년에 철도호텔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착공되면서 황궁우를 중심으로 한 환구단 일대가 사적 157호로 지정되었지만, 이후 각종 명목으로 문화재 지정 면적이 1,505평에서 1,310평으로, 다시 1,070평으로 축소되어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구단 정문, 어재실 등 철도호텔에서 사용되던 부속 시설들이 훼손되거나 방매되었다. 국제관광공사의 『조선호텔처리지(1967)』에 의하면, 정부는 팔각정, 석고단, 환구단 외의 호텔 건물 자체는 일본인이 시공한 건물로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방매된 시설들은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2007년 서울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의 재개발 과정에서 정문이 발견되었고, 음식점인 인수각도 변형되긴 했지만 환구단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문은 우여곡절 끝에 42년 만인 2009년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이전되었고, 2013년에는 일본식 조경으로 지적받던 잔디와 석등을 제거하는 등 복원 공사를 거쳐 일반에 재개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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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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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정영효, 「조선호텔’ - 제국의 이상과 식민지 조선의 표상」, 『동악어문학』 55, 동악어문학회, 2010.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73854
논문 김정선. 「조선호텔 벽화와 식민지 근대 벽화의 公的 기능」, 『미술사학연구』 290291, 한국미술사학회, 2016. 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5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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