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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의 유교 교육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성균관 내 사당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문(文)의 성격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무묘(武廟), 무(武)를 상징하는 사당은 무엇일까. 조선에서 무묘(務廟)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였다. |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의 유교 교육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성균관 내 사당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문(文)의 성격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무묘(武廟), 무(武)를 상징하는 사당은 무엇일까. 조선에서 무묘(務廟)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였다. | ||
− | 관왕묘(關王廟)가 조선땅에 생겨난 것은 선조 대의 임진왜란 당시였지만, 사실 무묘(武廟)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 + | 관왕묘(關王廟)가 조선땅에 생겨난 것은 선조 대의 임진왜란 당시였지만, 사실 무묘(武廟)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17일의 기사'''<ref>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303017_003 </ref>를 살펴보면 박아생(朴芽生)이라는 신하가 무묘도(武廟圖)를 바치며 훈련관(訓鍊觀) 북쪽에 무묘(武廟)를 세우자고 제안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세종은 이 안건을 가지고 집현전과 함께 재논의를 거쳤으나, "문(文)과 무(武)는 애초에 분리되는 것이 아닌 함께 다루어져야 할 덕목이다." 또는 "무성왕묘(武成王廟), 즉 무묘(武廟)를 따로 세운다면 문선왕(공자)은 문(文)을 전업으로 하고 무성왕(강태공)은 무(武)를 전업으로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문무를 하나로 보는 상도에 어긋난다." 라는 왕과 신하의 의견이 일치하여 무묘(武廟)의 설치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를 통해서 본래의 무묘(武廟)는 관우(關羽)가 아닌 무성왕(武成王), 곧 강태공(姜太公)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무묘(武廟)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유추가 가능하다. | 이를 통해서 본래의 무묘(武廟)는 관우(關羽)가 아닌 무성왕(武成王), 곧 강태공(姜太公)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무묘(武廟)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유추가 가능하다. | ||
2022년 12월 8일 (목) 11:52 판
목차
관왕묘를 중시한 조선의 왕들
Story
문묘(文廟)는 문선왕(文宣王), 즉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의 유교 교육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던 성균관 내 사당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문(文)의 성격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무묘(武廟), 무(武)를 상징하는 사당은 무엇일까. 조선에서 무묘(務廟)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였다. 관왕묘(關王廟)가 조선땅에 생겨난 것은 선조 대의 임진왜란 당시였지만, 사실 무묘(武廟)에 대한 논의는 세종 대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3월 17일의 기사[1]를 살펴보면 박아생(朴芽生)이라는 신하가 무묘도(武廟圖)를 바치며 훈련관(訓鍊觀) 북쪽에 무묘(武廟)를 세우자고 제안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세종은 이 안건을 가지고 집현전과 함께 재논의를 거쳤으나, "문(文)과 무(武)는 애초에 분리되는 것이 아닌 함께 다루어져야 할 덕목이다." 또는 "무성왕묘(武成王廟), 즉 무묘(武廟)를 따로 세운다면 문선왕(공자)은 문(文)을 전업으로 하고 무성왕(강태공)은 무(武)를 전업으로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문무를 하나로 보는 상도에 어긋난다." 라는 왕과 신하의 의견이 일치하여 무묘(武廟)의 설치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서 본래의 무묘(武廟)는 관우(關羽)가 아닌 무성왕(武成王), 곧 강태공(姜太公)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무묘(武廟)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유추가 가능하다.
결국 관왕묘(關王廟)는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關羽)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명(明)나라의 영향으로 한성 내에 생기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하고있는 '동묘(東廟)'라는 문화재로 남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묘의 정전 안에 있는 현판과 편액들 중에서는 조선의 국왕들이 직접 하사한 것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실록의 기사를 통해서도 어떤 왕들이 동관왕묘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성리학과 관련이 없는 외국의 신앙과 위인을 기리는 묘당을 설치하고 유지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조선의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도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무묘(武廟)는 어쩌다가 관왕묘(關王廟)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어떤 조선의 왕들이 관왕묘(關王廟)를 중요하게 여겼을까. 그리고 서울의 관왕묘(關王廟)에 얽힌 이야기들과 조선에서의 위상의 변화양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유추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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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4-03 | Story | Storyline | 관왕묘를 중시한 조선의 왕들 | 관왕묘를 중시한 조선의 왕들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S2022-R4-03 | 2022:윤종훈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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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왕묘(關王廟)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948 |
- type: 해설, 참고, 원문 / 사진, 동영상, 도면, 그림, 지도, 3D_지도, 3D_모델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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