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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 13년에 사직(司直) | + | 세종 13년에 사직(司直) 박아생(朴芽生)은 삼대 이후 문묘뿐 아니라 무묘도 건립하여 제향하였던 전통을 계승하여 숭문수무(崇文修武)의 도리를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 무묘를 훈련관 북쪽에 세우고, 둑소(纛所)도 옮겨 무관들이 제향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세종은 이를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검토하고, 또한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고하게 하였으나, 만대에 교훈을 남긴 공자는 문무에 대하여 초월적인 지위에 있는 백왕의 스승이므로 문무를 가릴 것 없이 존사(尊師)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세종 또한 사마온공(사마광)의 논의를 비교하며 "문무(文武)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닌 것인데, 만약 무성왕묘(武成王廟)를 따로 세운다면, 이는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하며 박아생의 상서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결국 무묘는 건립되지 않았다가,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무묘의 건립문제를 다시 건의하였지만 묵살되어 무신들의 상징은 결국 사상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원군을 파견했던 명나라의 신종이 조선정부에 무신(武神)인 관우를 봉안할 무묘의 건립을 요청함에 따라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關王廟)가 건립되면서 무묘를 대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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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9일 (목) 14:01 판
목차
문묘가 있다면 무묘도 있어야지?
Story
문묘는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와 4성 10철의 제자 및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2월과 8월에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유학의 최고 성지이다. 1398년(태조7)에 문묘를 건립하고 난 후, 국왕이 친히 문묘에 참배하는 행위가 숭문(崇文)의 행위, 즉 상대적으로는 경무(輕武)의 행동으로 비춰짐에 따라 무신들 일각에서는 이를 문제 삼고 무묘(武廟)의 건립을 요구하는 일이 생겨났다. 세종 13년에 사직(司直) 박아생(朴芽生)은 삼대 이후 문묘뿐 아니라 무묘도 건립하여 제향하였던 전통을 계승하여 숭문수무(崇文修武)의 도리를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 무묘를 훈련관 북쪽에 세우고, 둑소(纛所)도 옮겨 무관들이 제향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세종은 이를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검토하고, 또한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옛 제도를 참고하게 하였으나, 만대에 교훈을 남긴 공자는 문무에 대하여 초월적인 지위에 있는 백왕의 스승이므로 문무를 가릴 것 없이 존사(尊師)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세종 또한 사마온공(사마광)의 논의를 비교하며 "문무(文武)란 본래 두 가지가 아닌 것인데, 만약 무성왕묘(武成王廟)를 따로 세운다면, 이는 상도(常道)에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하며 박아생의 상서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결국 무묘는 건립되지 않았다가,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무묘의 건립문제를 다시 건의하였지만 묵살되어 무신들의 상징은 결국 사상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원군을 파견했던 명나라의 신종이 조선정부에 무신(武神)인 관우를 봉안할 무묘의 건립을 요청함에 따라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關王廟)가 건립되면서 무묘를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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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022-R5-08 | Story | Storyline | 문묘가 있다면 무묘도 있어야지?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S2022-R5-08 | 2022:박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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