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총은 오군영 및 수원의 총리영, 개성의 관리영, 강화도의 진무영(鎭撫營) 등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속오법(束伍法)에 따른 새로운 군사편제의 하나인 사(司)의 지휘관으로 약 600명 단위부대의 장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척계광(戚繼光)의『기효신서(紀效新書)』에 따라 창설한 훈련도감에 좌사·우사의 파총 2인이 처음 설치되었고, 1606년에 5인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의 편제에 의하면 1영(營)은 5부(部), 1부는 5사, 1사는 5초(哨)로 조직되어 훈련도감에는 25개의 사가 편성되어 있었으나, 5번(番)으로 나누어 2개월씩 교대근무하게 하였으므로 파총의 정원은 5인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편제는 조선 후기에 신설된 대부분의 군영에서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그래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에는 각각 5인, 총융청에는 3인, 수어청에는 2인의 파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 금위영과 어영청에는 각 지방의 수령으로 겸임시킨 외방 겸 파총이 각기 12인, 10인씩 배속되어 있었다. 그 뒤 1779년(정조 3) 훈련도감에 협연파총(挾輦把摠) 1인이 증치되어 지방사무를 담당하였다. 총리영·관리영·진무영 등에도 각각 12인, 6인, 10인의 파총이 두어졌는데, 대부분 인근 고을의 수령이나 전함관(前銜官)으로써 임명하였다. [1] 동파총인기는 하급 지휘관 가운데 동쪽 파총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