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축

hanyang
이수민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0월 25일 (일) 16: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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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철거는 총독부청사의 건설에 따라 1926년 10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이루어졌다. 광화문의 철거와 함께 남쪽 궁장의 철거도 이어져 동십자각의 좌측면 궁장이 사라졌다. 1929년에는 동십자각의 궁장이 완전히 떨어져나가게 된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도시계획에서의 역할이 그랬듯이, 박람회장의 공간적 배치에서도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설계자들은 이 식민권력의 상징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궁궐의 동편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인 엘리트들뿐 아니라 일부 일본인 지식인들까지도 이러한 조치에 내포된 역사적 폭력성에 대해 격렬히 비판했지만 그것은 말끔히 무시되었다. 시각예술사 연구자 홍 칼이 보여주었듯이 이와 같은 광화문에 대한 공간적 조작으로 인해 경복궁의 남북 축은 붕괴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행사용 회랑이 창출되었다. 그 결과, 이전한 광화문은 동서 축으로 형성된 회랑의 동쪽 축을 맡게되었으며, 경회루는 이 회랑의 서쪽 축으로 기능하게 된다. 1929년 박람회 때에는 주 출입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1]

광화문과 경회루, 이 두 개의 궁궐 건물은 행사용 회랑을 따라 늘어선 전시관들에 미적인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이 전시관들도 모두 언론 매체가 '순조선식'이라고 불렀던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이처럼 토착 문화를 수용하겠다는 자세는 물론 피상적이기는 했지만, 한반도와 그곳의 주민들이 제국의 물질적인 진보에 있어서도 종속적이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ㅇ르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관료들은 주 전시장의 건축을 조선인 건설업자들에게 맡겨서 조선산 건축 재료로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경성일보 1929년 7월 7일자

설계자들은 이 건축양식의 정통성에 대해 자랑하듯 떠벌렸지만, 그들 스스로도 대담하게 인정했듯이, 사실 이 건물들의 형태와 비례는 새로운 것이었다.[2]

더욱이 중앙 회랑에 딸린 전시관들이 표방한 이른바 '조선색'은 식민 통치 초기에 파괴된 궁궐 건물들을 복원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농후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조선인 비평가들도 즉각적으로 규탄하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국주의적 미학이 성취해낸 가장 큰 성공을 꼽자면, 아마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조선 문화를 시대착오적이지만 이국적인 볼거리로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1. Hong kal, "Modeling the West, Returning to Asia;"토드 a. 헨리 , 219쪽 재인용
  2. 조선과 건축 8집 9호., 1929년 9월호, 13쪽.또한 같은 책 12쪽을 참조할 것.